역 이름은 틀림없이「쾰른」이었다. 이걸 어쩐다지…. 침낭 개고 배낭 챙기고 세수하고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쪽 손엔 배낭 또 한쪽 손엔 침낭을 질질 끌고 기차 밖으로 뛰어나와야 했다.
사람들은 한 번씩 다 쳐다보고 갔다. 하긴 헝클어진 머리에 접지도 않은 침낭, 정리 안 된 배낭… 아휴! 내 생각에도 내 자신이 처량했다.
쾰른은 그다지 큰 도시가 아니라 구경거리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그 어느 도시보다도 대단한 충격을 줄 만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쾰른 대성당이었다. 쾰른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위치해 있어서 관광객의 눈을 한 번에 압도해 버리는 이 건물은 높이 백57미터의 고딕 건물이었다. 더군다나 독일 최대의 첨탑 건물이니 만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입장료를 내면 성당의 첨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계단이 자그마치 1백30여개나 되어서 산을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다음 여행지인 스위스의 쮜리히까지는 상당히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간표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독일 최대의 도시 프랑크푸르트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독일의 명실상부한 수도격인 프랑크 푸르트는 베를린의 우중충한 분위기와는 달리 활기차고 바빠 보이기까지 했다.
프랑크푸르트까지 온 이상 괴테 하우스를 안 갈 수야 없었다. 문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세계의 문학가와 관계되는 것이라면 거의 돌아보고 다녔으니까 말이다.
점심때가 훨씬 지난 후라서 폐점 시간에 늦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구경하기에 한산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플래쉬는 절대 불가라며 못을 박는다.
괴테가 언제적 인물인데 아직까지도 그의 유물이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러울 수가 없었다.
스위스의 쮜리히는 비교적 서늘한 날씨로 배낭족들을 반겼다. 우선 얼마간의 돈을 바꾸려고 환전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기막히게 기쁜 일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것인즉슨 가는 곳마다 환전할 때 배낭족들을 울렸던 그 커미션(환전에 붙는 세금)이 스위스에서는 단 한 푼 안 떼어내고 환전을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기분 좋게 기차역을 나섰지만 쮜리히 유스호스텔을 찾아나서는 것도 문제였다. 전화로 알아본 결과 종점 가기 전의 세 정거장 앞에서 내리면 호스텔 표지판이 보인다길래 잔뜩 긴장을 하고 내렸다. 하지만 트램 표지판조차 보이지 않아 물어물어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 앞쪽에는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동양인을 처음 보는지 자기네들끼리 치고 쑤시고 하며 쑥쓰러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다가가 호스텔의 위치를 물었다. 다행히도 그 선생님은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짐을 풀어놓고 내일이 토요일인 관계로 먹을 것을 챙겨 놓아야 했다. 숙소 가까이 있는 슈퍼로 식량을 사러 갔다.
유럽에서 식수를 사 먹으려면 반드시 하나씩 꺼내어 흔들어 봐야 했다. 유럽에는「탄산수」라는 것이 있는데 도무지 동양인 입맛에 맞지 않는 물이다. 그러나 겉모양으로는 일반 식수와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도 맨 처음에는 무턱대고 사서 손해를 많이 보았다.
또 주의할 것은 스위스의 슈퍼에서는 비닐 외의 쇼핑백은 유료라는 것이다. 물건이 많다고 한쪽에 걸려 있는 쇼핑백을 무단으로 이용했다간 주머니를 털려야 한다.
쮜리히판 상제리제 거리인 반호프거리를 죽 따라가다 보면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패스탈로찌 동상이 보인다. 그 공원은 쮜리히 주민들의 작은 휴식처인데 히피족에서 가족까지 다양한 시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쮜리히에서도 인상 깊었던 곳은 바로 쮜리히 대학이었다.
<계속>
[구미리내의 세계 배낭여행기] 11 유럽, 그 웅대한 역사를 따라 - 활기찬 도시 프랑크푸르트
첨탑 건물 쾰른 대성당 인상적
괴테 유물 고스란히 보존 "탄복"
발행일1994-04-10 [제1900호,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