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지난 4세대 동안 놀라운 발전을 경험했다. 미국의 과학잡지「포퓰러 사이언스」는 1992년 창간 1백20주년을 맞은 특집호에서 그것을 이름하여「전기시대」「원자력시대」「TV시대」「우주시대」「정보시대」라 요약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컴퓨터 기술과 전기 통신기술의 결합에 의해 정보사회라는 새로운 문명 형태로 진입하고 있으며, 여타 분야의 과학 기술에서도 지속적 혁명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과학 기술이 벗겨낸 우주의 신비는 경이로웠다. 맨해탄 계획(1945년의 원자폭탄 개발)의 성공은 원자라는 비가시적 실체 속에 가공할 에너지가 숨겨져 있음을 일깨웠고, 아폴로 계획(1969년 인간의 달 착륙) 이후의 우주산업 발전은 신의 세계였던 하늘을 인간의 거대한 실험실로 바꾸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물질적 차원에서 낱낱이 밝히겠다는 거대 생물기술인 인간 게놈계획은 생명윤리, 사회윤리문제와 얽혀 실로 그 귀추가 주목되는 전개이다. 바야흐로 인간은 과학 기술의 힘을 빌어 마지막까지 신의 소관으로 남아 있었던 생명현상마저 조작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신앙과 과학 기술이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그런 왜곡된 이미지를 심은 데에는 갈릴레오 종교재판 같은 것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도 마치 과학과 종교가 전쟁을 벌인 사례로 비쳐진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갈릴레오 사건은 교회가 과학자를 일방적으로 탄압한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사적 요인들이 얽혀 빚어진 인간관계의 복잡한 결과였고,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신학 측의 반응도 적대적인 것으로 획일화시킬 수 없음이 드러난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갈릴레오를 공식적으로 복권시킴으로써 신앙과 과학 사이에 빚어진 이 유명한 역사적 분쟁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역사 속에서 근대과학은 성서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출연했다.
버터필드경의 표현을 빌면「인류 사상 기독교 발생 이래의 최대 사건」이라 규정되는 근대과학은 16~17세기 과학혁명의 결과로서 그 장소는 기독교 문화권의 라틴유럽이었다. 또한 중세의 자연철학과 기술 전통에서도 교회는 그 후원자로서 수행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의 교회도 과학과 신앙의 이분법을 부정하고 하느님이 과학과 신앙 두 가지의 유일하며 동등한 근원임을 강조한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3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과학시대의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여 과학의 발전이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이요, 인간 정신의 성숙이라 강조했다. 요컨대 교회는「은총의 자극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도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정신이 준비된다」(사목헌장 57항)는 뜻에서 과학의 발전에 동조적이다. 가령 매스 미디어의 발전에 대해서도 그 기술을 활용하여 교회의 선교 사명을 더욱 충실히 수행할 것을 장려한다.
그렇다면 종교의 몫은 단지 과학기술의 동반자인가. 물질적 풍요로 말한다면 이렇게 호사스러웠던 때는 일찌기 없었다. 지식의 양과 질에서도 이렇듯 영리한 사람들로 꽉 찬 세상도 일찌기 없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갈팡질팡 한다. 그들이 믿었던 전통적 가치는 어느새 소멸됐고 바람직한 새로운 가치는 사회를 떠받칠 만큼 확립되지 못했다. 아니 물질지상주의는 생명 가치를 말살시킴으로써 본질적 가치 대신 오직 물질의 과소로 사물을 판단하는 윤리적 타락과 가치의 전도를 낳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날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사건들을 보라. 거기에 비록 센세이셔널리즘에 바탕한 고발성과 편파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물질적 성장과 지식의 확장이 결코 사람다운 삶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히 드러난다. 끝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치닫고 있는 물질적 성장은 이쯤 해서 정신적 각성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방영된 신흥종교 추적의 TV 프로그램들은 숱한 시람들이 어이 없는 말(교리?)에 현혹되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충격적 현실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종교는 과학과 달리 그 이론과 방법에서 검증이 불가하므로, 종교의 탈을 쓴 사이비의 것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킬 소지가 크다. 불쌍한 이들을 끌어모아 온갖 착취와 비행을 일삼는 것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반인륜적 사회 범죄이다.
기성종교는 이런 사회병리현상에 속수무책이란 말인가. 세상의 어둠과 부패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없을까? 오늘의 교회가 그 권위와 신뢰를 누릴 수 있음에는 시류에 휩쓸림 없는 전통 보전이 큰 몫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시간에 쫓기며 산업사회 조직 속에서 고달픈 세상살이를 해내야 한다. 예컨대 냉담자로 밀린 사람들은 그 마음이 교회로부터 떠나서가 아니라 혹시 교회와의 엄격한 약속이 버거워서 그리 된 것은 아닐까. 보다 너그럽게 기회를 베푸는 것으로 교회가 잃는 것보다 사회가 얻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면? 여기에 생각이 미치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 탓일까, 아니면 나의 어린 믿음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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