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이 있은 지 만 10년이 지났다.
조선교구 1백50주년과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 제45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 격동의 80년대를 마감하고 선교 3세기의 민족 복음화에 발돋움한 지 만 10년이 된 지금 한국 교회의 현주소가 어딘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태리 프랑스 베트남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성인을 배출한 한국 천주교회가 그 위상에 걸맞는 내적 성숙과 영성적 심화를 이루고 있는지 냉철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2백주년 행사를 치룬 후 지난 10년간 괄목할 성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일례로 신자 총수의 경우 84년 1백84만8천4백76명에서 93년 3백20만9천4백94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1백36만1천18명이 늘었다. 뿐만 아니라 10년 사이에 새 사제가 8백83명이나 배출됐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일이라 하겠다. 아울러 사제 성소 못지 않게 수도 성소가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한국 천주교회의 장래를 밝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급속한 복음화율이 곧 교회의 영적 진보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세 성장 못지 않게 기하급수적으로 불고 있는 냉담자와 행불자의 경우만 보더라도 가히「영적 공황기라」 우려할 만큼 심각하다.
2백주년 이후 지난 10년간 냉담자, 행불자 수는 84년 44만9천3백81명이던 것이 93년엔 79만2천4백73명으로 34만3천92명이나 불었다. 이는 93년 신자 총수의 24ㆍ69%에 해당하는 수치로 신자 네 명 중 한 명 꼴로 냉담을 하거나 행불인 실정이다.
이 같은「영적 공황현상」에 대해 사목자들은『한국 교회가 성인 시성 이후 외적인 성장에만 치중했을 뿐, 2백주년 정신을 계승하는 교회 쇄신운동과 재복음화 사업이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을 역으로 돌이켜 보면 냉담자, 행불자 문제와 같은 한국 천주교회의 당면 과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2백주년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놀라웁게도 이 같은 사목적 혜안은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이 벌써부터 직시하고 있었던 부분이다.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은 2백주년이 끝난 다음해엔 1985년「증거의 해」사목 교서를 발표하고『2백주년과 103위 시성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어떤 다른 민족보다 바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의미 심장한 증표이며 새로운 과제』임을 강조,『이 새로운 과제 해결을 위해 순교 선열들이 걸었던 증거의 역사를 계승해야 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처럼 중차대한 2백주년 정신 계승사업이 지속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열화 같이 한국 성인을 세례명으로 하고 주보 성인으로 삼으며 순교자 현양운동이 전국에서 타오르더니 10년도 채 못가서 시들해진 원인은 어디 있나? 2천년대 복음화를 눈 앞에 두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로서는 이 답을 얻기 위해 2백주년 그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복음의 정신
「2백주년 정신운동」은 한마디로『신앙 선조들이 순교정신과 이웃사랑, 전교열을 우리 안에 살림으로써 이 땅의 복음화를 실현하는 복음의 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금도「순교자적 삶으로 무장된 복음정신」으로 정의되는 2백주년 정신운동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미진하거나 부족했다』는 비판보다는『아직까지 분발할 요소가 더 많이 남아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는 2백주년 정신운동을 사장시킬 수 없다는 교회 지도자들의 강한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 신학자들 역시 이 땅의 복음 선교의 당위성과 근거를 제시하고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은 2백주년 정신운동뿐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2백주년 정신운동 계승사업을 누구나가 중요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실행에 있어서는 초창기부터 순탄치 못했었다.
85년 2월 15일 경기도 안양 라자로 마을 아론의 집에서 있었던 2백주년 최종 종합 평가회에서 당시 정신운동위원회 총무였던 이한택 신부는『2백주년 기념의 내적 심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정신운동위원회가 제일 먼저 구성됐어야 했는데, 다른 위원회가 한창 일하고 있을 때 부수적으로 설정돼 출발에서부터 정신운동위원회는 결정적인 한계성을 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신부는 또『당위성만으로 정신운동위원회가 발족됐기에 교회 쇄신과 선교 등 근본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다』고 자인하고『미흡한 준비 계획 단계에서부터 비롯된 이러한 한계성을 넘어서기 위해 교육 자료를 발행하고 교구 지도자들을 교육하였으나, 교구와 본당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 부족으로 자료 배부에 그친 점이나 양성된 지도자들을 폭넓게 활용하지 못한 점이 무엇보다 아쉽다』고 말했다.
아울러 당시 평가회에 참석했던 한 책임자는『2백주년 기념이 정신 면에는 무관심한 채 행사 제일주의로 흘렀다고 본다』고 비판하고『처음부터 정신운동에 대한 정의 자체가 모호했다』고 지적했다.
그는『본래 2백주년 기념 5개년 계획의 추진을 정신운동의 골격으로 보아 이를 각 교구장에게 맡겼으나, 후에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이 계획이 무시되었고, 이에 대한 시정을 하려 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었다』고 회상하고『2백주년 정신운동은 적어도 한 세대는 지속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평신도의 역할
2백주년 때 시성된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교회 직분에 따라 크게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면 성직자가 11명이고 평신도가 92명이다. 성직자 중에는 김대건 신부를 제외하고는 10명이 모두 프랑스 선교사들이다.
또한 92명의 평신도 성인 중 절반이 넘는 47명이 여자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교회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마 이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시성운동이 처음으로「평신도사도직협의회」의 건의로 시작된 것임을 알고 있는 신자들은 드물 것이다.
엄밀히 말해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신앙의 힘으로 복음화의 서광을 밝혔고, 그 신앙의 유산을 계승한 평신도 후손들이 103위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 반열에 올려 놓았다.
또 그 후손들이 로마에서만 거행되는 걸로 전 세계가 알고 있던「시성식」을 교황 방한과 함께 한국에서 거행토록 하는 기적과 같은 일을 훌륭히 치뤄냈다.
이처럼 엄청난 기적을 일궈낸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은 신앙의 유산으로 이어받았던 초기 신앙 선조들의 복음정신을 2백년 뒤 후손들에게 물려줄 당연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2백주년의 정신운동 계승은 평신도 각자가 교회와 가정, 직장과 사회에서 얼마나 제 역할을 다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 교회 지도자는『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비유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평신도들의 역할론을 강조했다.
그는『2백주년 복음정신이 현재 미흡하다면 그것은 사목자들의 책임보다 오늘날의 평신도들의 몫이 더 크다』라고 지적하고『교회 쇄신과 가정 및 사회 복음화는 평신도 스스로 얼마 만큼 신앙에 철저하고 영성적으로 무장돼 있느냐가 가늠한다』라고 역설했다.
2백주년 정신운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정진석 주교는『2백주년 이후 교회의 내적 성장이 일반 사목자들의 욕심을 채울 만큼 발전하진 못했지만 성소자 수가 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상당 부분 성숙해진 것도 사실』이라면서『교회와 사회가 더 복음화되기 위해선 평신도 개개인이 자신의 영신적 성화에 노력할 뿐 아니라 사회의 정신적 기강을 바로 잡는 일에, 또 생명존중운동을 전개해 사람들의 양심을 회복시켜 주는 일에 실천적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이는 2백주년 정신운동 계승의 몫이 평신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운동의 첫 출발은 평신도 각자가 자기 중심의 유치한 모습에서 이웃 중심의 성숙한 모습에로 변모해 나가는 것에서 시작됨을 재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 200주년 기념 주교위원회 기구 도표〈신문 참조〉
◆ 2백주년 기념 정신운동위 일지 종합 - 82년에 뒤늦게 설치 기도ㆍ정신운동 주도
2백주년기념 정신운동위원회(위원장=정진석 주교)는 2백주년 기념 주교위원회 산하 4개 집행위원회 중 가장 늦게 설치된 위원회이다.
2백주년기념 준비위원회가 80년 11월 21일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2백주년 주교위원회로 확대, 개편될 때 산하 위원회는「기념행사」「기념사업」「사목회의」등 3개뿐이었다.
이후 82년 5월 25일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정신운동위원회 설치을 요청, 집행위원회가 4개 기구로 확대됐다.
정신운동위원회가 뒤늦게 발족한 이유를 2백주년 기념 주교위원회 위원장 윤공희 대주교는 당시 정신운동 교구 담당자 연수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당초 2백주년 기념 주교위원회 산하 3개 집행위원회에 2백주년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별도로 정신운동위원회를 조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을 추진하다 보니 2백주년 정신을 깨우쳐주는 보다 전문적이며 적극적인 운동의 필요성이 요청돼 조직하게 됐다』
82년 10월 30일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에서 제1차 운영위원회 회의를 갖고 기본 운동 방향을 모색한 정신운동위원회는 83년 1월 17일 서강대학교 내에 사무국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업무에 착수했다.
「내적으로는 신앙 쇄신을, 외적으로는 민족 복음화를 위해 순교정신을 고취시킨다」는 기본 목표 아래 업무를 추진한 정신운동위원회는「2백주년기도문 바치기」「성서 읽기」「매월 첫 목요일 성시간 봉헌」「가정기도운동」등을 전개했다.
정신운동위원회는 또 구역반장 지도자용 교육 자료로「교회 창립 50년사의 순교정신」과「3백년대의 선교정신」등의 책자를 발행, 배부하고「성시간 자료」「2백주년 기도문」「2백주년 기념 악보」「1984년 주교단 사목교서」「일일 피정 자료」리플렛「시대적 징표와 우리의 과제」등을 제작, 배포했다.
또 전국 각 교구를 순회하면서 2백주년 정신운동 연수회 및 강연회도 개최했다.
정신운동위원회는 초창기 위원회 자체 성격 파악조차 힘들 정도로 난항을 거듭했으나 2백주년 기도문을 제작하면서 확실한 일감을 찾기 시작했으며 84년 특별 성년 마감을 위한 7일 기도운동을 전개를 끝으로 주관사업을 마무리했다.
[특별기획 - 2백주년과 103위 시성 그후 10년을 진단한다] 3. 2백주년 정신운동
계승 발전은 평신도의 몫
주관 부서 지각 출범 교구ㆍ본당 관심 부족
외적 행사 치중 쇄신ㆍ재복음화 노력 미흡
발행일1994-05-15 [제1905호, 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