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멀리서 기다리고 깊어가는 가을 끝자락 꼭두새벽에 홀로 부스럭 거리며 짐을 챙긴다. 불을 낮게 밝힌 스탠드에 생겨난 자기 그림자를 보고 흠칫 놀라면서 어느틈에 짐꾸러미에 배어든 여수를 털어내지 못하고 잠시 망연자실해 있는 나를 본다. 있는것 모두 그대로 가져가고픈 아름다운 마을이지만 이곳 쌍뽈은 우리집 한옥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나는 우리 아이들과 얼마나 멀리에 있는것 일까, 집에 돌아갈 날 순례의 길은 어디서 멈출것인가 아득하기만 하다. 풀벌레 소리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이 아름다운 중세 마을에서 빠져나가기로 한다. 피에스타의 시동을 걸고 차밖에서 「오르브와 무슈!」라고 손짓하는 성실하고 따뜻한 Hotel St. Paul의 바테더에게 작별을 고한다.
새벽같이 길을 떠나니 뜨거운 차라도 한잔 드시고 가시라고 간곡히 몇번이고 되풀이 청하는 미남 청년 때문에 몰래 한기처럼 찾아든 여수는 사라지고 다시 처음 집을 나서는 훈훈함이 채워졌다. 남쪽 해안으로부터 소금냄새와 함께 보라빛 하늘이 몰려오고 차는 꿀뢰르 드 삐뽈(자주빛)이라는 까페앞을 지나 마을 입구의 Col. ombe D' or(황금비둘기)를 돌아나오는데 쌍뽈에서는 몸만 빠져나오는 기분이다. 내 마음은 아직도 저 예쁜 마을 속의 수놓은 오래된 침대에서 잠들어 버린것 같다. La Colombe D' or에서의 어제 저녁식사는 문자 그대로 황금처럼 빛나는 예술의 만찬이었다.
이 까페는 시냑, 모딜리 아니, 미로와 마티스, 칼더, 보나르와 피카소, 부라끄와 레제 뿐만 아니라 카임수틴, 세자르와 아르망 등의 현대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환 회화와 조각이 벽면을 차지한 레스토랑으로 유명한데 그 유래는 금세기 초에 현명한 이 여관주인이 쌍뿔과 방스 등지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들에게 밀린 숙비 대신에 그들의 그림이나 조각을 받아 식당 벽에 장식하는 높은 예술감상의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의 명사들이 이 지역을 방문 할때면 반드시 이 식당을 찾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존·F·케네디와 드골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 마릴린 몬로, 지나 롤로브리지다 등 끝없는 명사들의 방문록과 사진들이 쌍뿔마을 청사에 전시되어 있다.
떠나는 아쉬움을 떨치려고 A8번 고속도로를 만다면서 피에스타 악셀을 힘껏 밟는다. 쪽빛 해안에서 부는 미풍으로 동이 터오고 날이 밝는다.
산들은 세잔느가 그린 상빅또와르 산을 닮아있다. 쥬라기와 백악기 사이에 지각변동으로 바다속이 융기 되어 있는 형상인데 대부분의 지질은 석회암이다. 엑스프로방스에 내려 아침식사를 간단히하고 세잔느화실과 옵티칼아트(빛과 기하학을 주제로 한 구성에다 착시현상을 가미한 미술)와 키넥틱아트(움직이는 미술)의 창시자 바사렐리의 미술관을 찾는다. 세잔느의 화실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부터 표시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이 나라가 최우선으로 다루는 것이 예술과 문화임을 알 수 있다. 세잔느의 화실은 정말로 작다.
그러나 이 작은 화실에서 세잔느는 그의 후기 인상파 운동을 근대미술의 한뚜렷한 이념으로 정착시켰고 큐비즘(대상물을 주지주의로 해석하고 그 기법으로 면 분할을 시도한 금세기 초 근대회화의 한 유파)을 창시하였다. 바사렐리 미술관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림 한점 크기는 세잔느 화실보다 커서 그림에 맞추어 마치 비행기 격납고 같은 미술관을 지었다. 고대, 중세, 근대와 현대 모두가 뚜렷한 발자취와 자기 목소리를 내며 공존하는 이나라 문화예술 보존정책이야말로 칭송받을 만하다.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지방은 이탈이아의 토스카나 처럼 참으로 문화유적이 풍부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한 흔적을 찾아 그들의 발길 따라 거닐고픈 지역이 산재해있다.
아틀르에 가면 고호가 그린 「밤의 까페」가 있을 것이고 론(Rhone)강 하류의 밤하늘을 그린 「별이 빛나는 밤」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비뇽은 일곱명의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1309년부터 1377년 까지 로마에서 이곳으로 교황청을 옮겨 집무한 역사적 사실로도 유명한 곳이다.
피에스타는 최고속도를 내어 A7번 도로를 따라 북상하며, 발랑스에서 그레노불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가 샹베리를 지나 동계올림픽이 열린 알베르빌을 향한다.
갑자기 침엽수림 사이로 흰 눈을 머리에 인 알프스의 웅장한 자태가 나타난다. 옛날에 물좋고 산좋은 산골마을 알베르빌은 오간데 없고 거창한 올림픽의 뒤끝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알베르빌로 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는 아직 그대로이다.
이 초라한 피에스타가 오픈카 였으면 하고 이때처럼 바랜적이 없었다. 차 옆과 뒤에 나뒹구는 낙엽을 흩뿌리며 도열해 있는 키큰 가로수와 하염없이 똑 바로난 찻길을 나란히 하고 흐르는 알프스의 차디찬 계류를 신나게 거슬러 오르면 알베르빌을 지나치는 갈림길이 나오고 나는 으진느를 거쳐 메제브 가는길로 숨가쁘게 피에스타를 몰고 간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아마도 알베르빌에서 샤모니까지의 길처럼 아름다울 것이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샤모니에서 로잔느로 넘어가는 몽블랑 넘기의 벼랑길 같을 것이다. 으진느에서 메제브까지는 계류와 폭포, 터널과 다리를 쉴새없이 넘나드는 정말 천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메제브 못미처 홀퀴메라는 산골마을이 있는데 이 근처에는 니콜라우스 성인을 모신 작은 산골성당이 있다. 언제나 열려진 이 성당의 제대 앞에서 번번이 나는 얼마나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렸는지….
이 성당앞에는 맑은 샘이 솟아나오는 우물이 있고 그너머에 이곳에서 삶을 마감하고픈 정말 아름다운 마을
묘지가 있다. 대리석관과 십자가와 누군가가 끊임없이 갖다놓은 꽃들에 쌓여있는 이름없는 산골마을의 묘지가 바라보이는 작은 까페에서 뜨거운 차 한잔을 마시고 다시 순례의 길을 재촉한다.
메제브에서 보는 웅혼한 알프스 빙하와 산록을 보면 저절로 이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찬미가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 오후 늦게 샤모니에 도착하여 치즈 퐁듀로 저녁을 떼우고 일박한 후 나는 이번 순례의 목적지인 롱샹성당을 가기 위하여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은 4천8백7m의 높이를 자랑하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이상은 항상 그 위에 있다.
맑게 개인 하늘과 하얀 눈폭풍이 날리는 몽블랑 정상을 앞뒤로 바라보며 알프스를 넘는 나의 마음에 벌써 남불지방의 따뜻한 햇볕이 사라지고 숲의 어두움과 비밀스러움이 찾아 들었다. 로잔느에서 브장송을 거쳐 벨로트(Belfort)로 가는 길에서 나는 디누 리파티(Dinu Lipatti)라는 요절한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를 기억해낸다. 그가 1953년 가을 주치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의 연주를 듣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병 깊은 몸으로 바하를, 「예수는 만인의 소망」을 치는 소리가 문득 들려온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나이를 살고 갔다. 벨포트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를 가다보면 롱샹마을이 나오고 역에서 한 km쯤 역시 북서쪽으로 구릉을 올라가다 보면 작은 순레교회가 문득 나타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사람들이 롱샹 성당으로 부르는) 「언덕위의 성모성당」이다.
롱샹은 알퐁스도오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무대인 알사스지방 끝언저리에 위치하여있다. 이곳은 양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통일도일후 끊임없이 프랑스와 대립에 이은 대결의 장으로 뒤바뀌었던 격전지중의 하나로서, 희생의 터, 추념의 장이 되어왔던 곳이다.
2차 대전전에 이곳에 있었던 네오고딕 양식의 교회는 도미니꼬 수도회 소속의 성당으로 성모님을 조보로 모신 순례자 교회였다.
대전후 「장소성의 회복」「기억의 전승」이라는 의미를 부여받고 설게에 착수한 르꼬르뷔제는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자였고 신앙은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그 무엇보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였기에 이 성당의 건축가를 추천하는 역할을 맡은 리옹의 알랭 뀌뛰리에 신부의 안목에 들어오게 되었다.
「좋은 클라이언트」(건축주)는 좋은 건물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꾸뛰리에 신부는 전회에 기술한 방스 성당을 산상 도미니꼬회를 대변하여 실무적으로 마티스에게 의뢰한 장본인이기도 하였고, 나중에 라 뚜우레 수도원 설계를 르꼬르뷔제에게 맡기도록 주선하기도한 성예술 애호가였다. 역시 그는 성 예술잡지인 Art Sacre'의 편집장이기도 하였다.
자 이제 흰 채광창과 검은 지붕만 보이는 저 「높은 곳의 성모 성당」(Notre-Dame-du-Haut)으로 올라가 보자.
벽돌은 제각기 안쪽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숙여있으며 이 때문에 캔틸레버(내민형상) 지붕은 옛 프랑스 농민의 고깔이 변형된 옛 수도회 수녀의 머릿수건 같이 보인다.
구릉을 오르면 남쪽 벽과 북측 채광탑 사이로 뚫린 입구가 맞이하는데 남쪽벽면의 개구부는 참으로 구성주의적이며 순수한 벽면의 회벽 투스코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이 남쪽벽은 그 두께가 2m를 넘는 곳도 있는데 이것은 2차대전때 파괴된 기단석과 기와장들을 넣어 만든 역사적 유물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벽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이는 작은 개구부는 내부에서 크게 확대되어 내부공간에 신비한 빛의 연출을 보여주는 꼬그뷔제 자신이 만든 색유리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우리는 성모님을 찬양하는 몇개의 낯익은 글들을 읽을 수 있다. Stella Maris Regina coelli는 하늘의 여왕이다. 차거운 바닥의 돌들은 제단 방향으로 길게 놓여있지만 어느것 하나 똑같은 규격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하느님의 백성이 그러하듯이….
간명하게 한쪽 편으로만 치우치게 놓여져 있는 장궤를 할 수 있는 의자 역시 꼬르뷔제의 디자인이고 제대와 십자가 촛대도 그의 작품이다. 일구후면 서쪽에 채광창 하부에 부제단이 놓여있는데 정말 그곳에는 성스러운 빛이 솨-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려온다. 꼬르뷔제는 1911년에 로마 근교 티볼리의 동굴에서 체험한 빛의 영감을 여기에서 표현하였다고 그의 메모장에 쓰고있다.
제대의 바깥쪽은 1년에 두번 있는 순례 예절 행사를 위한 상설 야외제단이 마련되어 있는데 여기를 중심으로 약 1만여명이 옥외미사를 볼 수 있다.
이 성당을 방문할때 마다 제일먼저 비교되어 떠오르는 곳은 한국의 천진암 성당터와 꼬트디브와르아비쟝의 대성당이다. 무참하게 깍여진 천진암 정상의 넓은 터에 세계 최대의 성전을 짓겠다는 발상과 꼬트디브와르라는 아프리카의 빈국이 지은 로마베드로 성당보다 큰 석조건물에서는 이곳 롱샹의 언덕처럼 예술과 자연이 공존하는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어서일까?…
이 작은 성당은 마치 우리 불교사찰의 대웅전처럼 적은 순례자들의 무리가 적은 순례자들의 무리가 안에서 기도와 묵상을 바칠수 있으며 야외의 대미사 때에는 건물자체가 제단과 제대가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세계 건축가대회도 열렸고, 이곳을 방문하는 건축학도와 순례자를 위하여 파리 Est역에서는 아침 7시에 르 꼬르뷔제호라는 특급 열차가 매일 벨포트를 향하여 떠난다. 정말 작지만 얼마나 위대한 하느님 백성의 집인가? 지붕 디자인은 참으로 독특한 형상으로 끄로뷔제는 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벽면으로부터 철주를 바쳐 지붕을 띄우고 그사이로 빛이 들어오게 하였다.
이 지붕디자인의 모티브는 꼬르뷔제가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줏은 게껍질에서 힌트를 얻었으며 그 구조는 비행기 (당시의 복엽기) 날개에서 인용하였다고 한다.
롱샹교회 내부는 한마디로 현대의 까따꼼바이며 작가의 말대로 「열렬한 기도와 묵상의 방주」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의 한사람 르 꼬르뷔제는 이 작품하나로 일사불란하게 단순화 모들화로 치닫고 있었던 현대건축의 흐름에 강한 충격을 가하였는데 그 자신 역시 일관되게 주장하였던 기계주의 미학에서 자연주의로 환원하는 일대 전환점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스위스의 라 쇼드 퐁 (La Chanxde-Fonds) 과는 같은 위도와 경도에 롱샹이 있다. 일년의 반이 하얀 백설로 덮힌 쥬라 산맥에서 숲의 여왕을 찾아 헤매었던 그는 마침내 롱샹의 언덕 상록의 숲위에 1956년6월25일 「하얀건축의 여왕」을 헌당하였던 것이다.
[세계의 성예술 순례] 6.현대의 까따콤바…기도 묵상의 “방주”
프랑스 롱샹 「언덕위의 성모성당」
게껍질서 힌트 얻은 검은 지붕 독특
색유리화·제대·촛대도 건축가의 작품
상설 야외제단 마련 만여명 옥외미사
발행일1992-12-13 [제1834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