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본당에 있으면 일거리가 없으니 수녀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몇몇 수녀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님의 말씀처럼 일거리라는 것이 그 지역의 교우집 방문이나 예비자 지도뿐이라면 대부분 농촌본당에서는 4월부터 12월까지 사실 일거리가 없는 것이다.
농번기의 교우집 방문은 오히려 폐가 되는 수가 많으며 예비자가 있어도 바쁜 가운데 교회에 오라는 것도 미안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활동하지 않는 것이 그들을 생각해 주는 결과가 되고 그냥 시간을 보내자니 허송세월 같아 양심에 걸린다. 더구나 그 지역교회에서 생활비조차 어렵다면 가버리는 것이 상책인듯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교님은 수녀의 일감을 그렇게는 보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내셨던 것이다. 한 본당에 수녀가 와있다면 그들은 다만 그 본당 교우나 예비자를 위해서만 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녀님들이 본당 신부를 위해서 온 것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지역사회를 위해서 와 있다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수녀가 그 지역사회의 햇빛이 될 수는 없을까?
길거리에서나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께 먼저 인사하고 그들 하나 하나의 엄마가 되기도 하고 언니가 되기도 하고 따님도 되어 주기도 하는 착한 식구가 되어주는 것 말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병자가 있으면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필요하다면 노인집에 물도 길러주며 냇가에 가 엄마없는 아이의 빨래도 빨아주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농사철에는 밥도 지어 날라다 주면서 모든 지역민들과 친숙한 수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요즈음 생명의 공동체 운동을 하느라고 농민, 도시주부들을 자주 만난다. 수녀복을 입은 사람으로 그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문제를 찾고 해결해 가는 동안 주교님의 말씀으로 나자신을 점검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안전한 먹을거리를 살리는 운동, 환경을 살리는 차원에서 개신교 불교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이 일을 해나가는 동안 수녀라는 복장이 때로는 그들과 가까이 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뢰를 얻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진정한 일감이 무엇인가? 지역사회의 햇빛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여러 사람과 부대끼면서 자질구레한 것까지 신경쓰다보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달플 때도 많지만 생명을 살리고 가꾸는 일이 나의 일감이라 여겨져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기도드린다.
『주님, 당신이 제게 맡겨 주신 일감을 저 스스로 찾아 나서게 하시고 부족한 저이오나 이 지역사회에서 작은 빛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