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책임을 마치고 총총히 성당에 늘어서는 수련 수녀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나는 나자렛의 마리아를 본다.
온 종일 모든이의 종처럼 수도 공동체의 가사일과 허드렛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맡겼던 그들, 부엌 냄새가 잔뜩 배어있는 그들의 몸에서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응답이 향기처럼 풍긴다.
그렇다. 가브리엘 천사의 영보를 듣던 나자렛의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이러했으리라. 나자렛의 마리아는 나에게는 동정서원(童貞誓願)의 한 표상(票象)이다. 그녀는 동정서원이 하느님의 몫으로 따로 떼어지는 성별화(聖別化) 이상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는 자리인 태어나는 자리인 태(胎)를 대지(大地)로 비유한다면 동정은 대지가 생명의 씨앗을 수용할 수 있도록 비어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미 어떤 씨앗이 자라고 있는 대지에는 다른 씨앗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게되듯, 자신이 「무엇이 되어버린 사람」은 하느님이 뜻하신 자신」을 받아 키울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을 야훼 하느님 신앙에 대한 순수성을 처녀의 동정성에다 비유했던 것같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할 수 있는 「동정녀」였다. 그녀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태에서 육화(肉化) 시켜 살아있는 영원한 말씀으로 이 세상에 낳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영원한 동정 성모 마리아라고 부른다.
동정을 서원하는 이는 누구나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앞으로 자신의 전 삶을 하느님께 「당신의 뜻만을 잉태하여 낳는 태」로 봉헌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다. 젊음도 있겠지만 과거의 분칠이 말끔히 씻겨진 수련 수녀들의 얼굴에서는 그러한 동정의 아름다움이 한껏 빛난다. 결코 순진무구함이 아닌 해맑음이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려 말갛게 닦아놓은 거울처럼 그들의 모습에서 빛난다.
아직 동정서원을 준비하고있는 그들인데도 이미 서원을 한 수녀들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서원한지 14년이 되어오는 오늘 나의 모습에도 그 아름다운 동정성이 빛나고 있는지 아니면 『방이 다 찼습니다』라고 말한 2천년전 베들레헴 여관 주인의 모습을 흘리고 있는지 돌아보며, 임신년 (壬申年) 대림절을 지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