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본당 발령 소식이 기뻤던 까닭은 본당 신부님이 P신부님의 동생이라는 것이었다. P신부님은 내가 로마에 있을때 잘 알던 분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다정다감 하였으며 말씀도 조용조용 하시고 인자한 얼굴에 늘 웃음이 있던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뿔사! 막상 본당 신부님을 첫 대변하고 보니 우락부락하게 생긴 금복주 얼굴에다 어찌보면 깡패같기도 하고 산도둑같기도 한 인상에 외모로 보나 말하는 품새로 보나 점잖은 구석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루는 『신부님, 레지오 훈화를 하러 가야하니 그 교우 집 길을 좀 가르쳐 주세요』하고 공손되이 청했더니 신부님 왈 『비도 오고 하니, 가서 자빠져 자소』하는 것이 아닌가! 그 옆에는 교우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순간 내 머리에는 「신부님이 한번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하지 않으면 불벼락이 떨어진다. 이 신부님은 욕 잘하고 술 잘 마시며, 수녀와는 어느 본당서든지 1년 이상을 함께 생활한 적이 없는 별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이 번쩍 스쳐 지나가며 「아이구 오늘이 그 시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꽤나 고집스런 성미라서 남에게 지려고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조심스레, 치밀어 오르는 나의 화를 꾹 눌러 참았다.
또, 교리반을 함께 하는 데 당연히 계획표와 진도에 맞추어 나가야 했지만 신부님은 막무가내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것이었다. 도무지 어느것 하나 비위에 맞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직 신설 본당인 그곳의 상황으로나 사제의 성격과 기질을 보아서나 내가 어떤 중대한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내가 이곳에서 살아 남을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의 고집과 계획을 포기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생활을 실제로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안 되는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그 결단 후 만사는 순조로왔고 또 그처럼 투박하고 직선적이긴 하지만 신부님의 삶속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따스한 인간애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뒤 물론, 힘든 순간들도 많았지만 무척 은혜로운 체험들을 엮어낼수 있는 시기가 되어 주었다.
세월은 흘러 이제 은경축까지 지내신 그 사제의 삶에서 나는 또 새로운 양식을 얻게 된다. 강한 대장부와도 같은 기질 때문인지 인상은 별로 다름이 없으나 좋은 것은 손쉽게 남에게 주어버리는 자연스런 행동, 병자와 한숟가락으로 먹기도 하고 얼굴을 맞대고 웃기고 울리는 순수한 애정표현들, 불의 앞에서는 황소처럼 치받는 강직성, 자선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자나 권력자들에게든 당당하게 손을 내밀 수 있는 통배(?), 「사람부터 살려 놓고 보자」인 인간적인 마음씀, 항상 빈털털이 같지만 모든 것을 안고 사는 듯한 풍요로운 모습들 속에서 배어나오는 인품은 참으로 고귀해 보인다.
지금은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사슴 여우 등을 기르며 자연속에서 살아가고 계시는 이 「소문난 사제」의 삶에서 나는 인간적인 예수님의 친구를 보는 흐뭇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