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고속도로(Stra-da del sol)를 따라 리비에라를 따라 올라가면 이탈리아 제일의 무역항 제노바가 나온다. 길은 해안의 절경과 숨바꼭질을 하며 터널과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게 계곡을 가로지르며 세워진 다리위로 끝없이 이어져 간다.
잠깐의 상념에 젖을 사이도 없이 대낮에도 노란 안개 등을 켜고 무섭게 달려드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를 피하고 나면 곧이어 재규어나 아우디가 백미러 속으로 달려온다. 불쌍한 나의 피에스타(우리나라에선 프라이드)를 힘껏 채찍질 해 보지만 기껏 시속 1백60km가 고작이다.
■ 쪽빛색 해안따라
문득 내가 좋아하는 이태리 차 한대가 앞에 보인다. 마세라티는 수수하지만 기품있는 차로서 이탈리아 공업디자인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명차이다. 마세라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차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다가 아차 하는 순간 제노바로 들어서는 길을 놓치고 말았다. 하는수 없이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서 해안선을 따라 도는 지방도로로 들어섰는데 유러비죤 가요 콘테스트로 유명한 상레모가 나왔다. 이곳은 리비에 라라는 이름의 풍광 좋은 지중해에 연한 이태리 해안 도로 드라이브의 종점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간단한 국경 통과 절차를 밟고 나면 우리나라 발음으로는 좀 무엇한 M-enton이 프랑스의 첫도시로 등장하는데 사람들은 이곳 말똥에서부터 상트로페까지의 해안을「꼬다쥐르」라 부르는데 우리 고사성어의「청출어람」이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남빛 즉 쪽빛색의 해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망똥을 지나기 전에 나는 반드시 묵주기도 한단이라도 바치고 가야할 곳이 이곳 어딘가에 있기에 나는 어렵게 물어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의 묘소를 찾는다. 그는 20세기 최대의 건축가였으며 샤를르 에두아르 쟌느레(Charles Edo-uard Jeaneret)라는 이름의 쉬프레 마티스트(순수파의 화가)로서 동료 화가 오장팡(Ozenfant)과 더불어「입체파 이후」(Apres Le Cubisme)라는 선언을 그들의 전시회를 통하여 주창하였던 순수 이상주의자의 표본이었다.
르 꼬르뷔지에는 바로 다음에 찾아갈 롱샹 언덕의 순례자 교회인 성모마리아 성당을 설계하여 2차 대전후 세계에서 가장 빛 나는 건물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있어서 젊은 시절 건축가의 길을 강렬하게 유혹하였던(물론 그의 작품을 보고)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묘소를 찾는 일은 적어도 내 순례의 여정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땅 곶(Ca p Mart-in) 로께브린(Roquebru-ne)언덕 지중해의 쪽빛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한평 남짓한 땅에 평생 사랑하였던 부인 이본느 갸리와 같이 묻혀있는 묘역은 르 꼬르뷔지에 본인의 디자인에 따른 것이다.
1965년 8월 27일 갸프 마르땅 해변에서 수영팬티 차림으로 불귀의 객이 된 그는 죽기 2년전 무슨 연유에서인지 먼저 간 아내의 묘비와 함께 한 자신의 묘비를 스케치 하였다.
프랑스 국경지대의 쥬라산록에서 스위스인으로 1887년에 태어난 그가 부인의 고향이자 자기 옛 선조의 고향인 쪽빛 바닷가, 늘 햇빛이 따스한 꼬다쥐르의 해변에 자신을 묻은 것은 일년의 반 이상이 눈에 덮인 어두운 숲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기 싫어서였을까?…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내눈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알프스의 준봉이 눈에 들어오고 까닭모를 슬픔이 몰려와 하고많은 사연들을 기억나게 한다. 문득 여름의 나라에서 눈의 나라로 가고 싶은 충동이 가슴 속에 일렁이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한번 무덤가를 돌아보고 가지고 온 장미 한 송이를 내려놓고 언덕을 내려왔다.
몬테까를로 시내를 지나 니스에 접어든다. 해변가에 지천으로 널브러져있는 토플리스의 여인들을 힐끔 볼 여유조차 내게 없는 것이 안타깝다. 마르크 샤갈 미술관과 고대 경기장 내에 있는 마티스 미술관을 폐관 시간전에 보려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 정겨운 샤갈미술관
샤갈 미술관은 언제 보아도 정겨웁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부드러운 빛과 바깥 벽에 장식된 모자이크 벽화가 연못에 비치는 것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도 성서를 주제로 한「다비드왕」「아브라함과 세천사」「홍해를 건너다」「십계명 판을 부스러뜨리는 모세」 등의 연작은 옛날 학창시절 성서모임에서 공부하던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다시 떠오르게 한다.
유태인의 혈통으로 백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난 그는 페테르스브르크에서 수학하였고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활동하고 노년에는 니스 근교 방스와 쌍뽈에서 여생을 보낸 무국적자, 세상의 에뜨랑제였지만 모든 현대인, 즉 고향상실자(H-eimatlosingkeiter)를 위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그의 예술은 항상 짙은 향수를 담고 있으며 비현실적인 꿈과 추상으로 우리 모두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고향을 그려 보이고 외양간과 송아지를 거리의 악사들과 아름답게 성장한 신랑 신부를 만나게 하고 천사와 성모 마리아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를 보여주며 꿈에도 그리운 어머니를 우리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과 함께 우리 앞에 내어 놓는다.
샤갈 미술관은 돌아나올 때도 느낌이 항상 따뜻한 곳이다. 그 이유는 진입시 입구가 도로에서 슬금 슬금 내려가게 되었으며 현관에 계단이 없고 문턱이 높지 않다는 것과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출 콘크리트의 소박한 외관에 기인하는 듯하다. 어느 곳에서도 권위를 찾아 볼 수 없는 샤갈미술관은 그의 작품처럼 포근하고 정감 어린 곳이다.
마르크 샤갈 미술관에서 보다 윗쪽에 위치한 앙리마티스 미술관은 그의 니스 시절의 작품과 지금부터 찾아갈 방스(Vence)의 로사리오 성당(Chap-elle du Rosaire)의 모델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밖에 많은 스케치와 조각들이 있는데 특히 일반적으로 쉽게 그려진 것으로 생각하는 그의「댄스」연작을 위한 스케치북(한장 한장 아크릴 판으로 보존되어 있다)을 떠들어 보노라면 마티스야 말로 그의 예술을 극명하게 선과 색으로 표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화가임을 알 수 있다.
니스와 깐느 사이의 깐느 쉬르 메르(Cannes Sur Mer)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약 15km를 올라가노라면 남불 프로방스 지방의 전형적인 풍경이 시야에 전개되고 마치 꿈속에서 나타난 것 같은 중세의 산성 도시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샤갈과 마티스, 피카소와 브라끄, 보나르와 유뜨릴로가 그들 예술의 근거지로 삼았던 쌍뽈(Saint-Paul)마을이다.
■ 중세동화속의 마을
쌍뽈은 중세의 시간이 바로 그 자리에서 마법의 지팡이로 멈추어 버린 듯한 동화 속의 마을이다. 거리에 박힌 조약돌 하나 하나와 조그마한 샘터와 가로등과 문패 어느 것하나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정말 이곳은 프랑스 사람들의 북촌 마을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 싶다.
이 눈에 넣고 싶은 마을 입구 언저리에 유명한 메그 재단 미술관(Foundation Maeght)이 있다. 파리에서 유명한 화랑 경영자였던 메그(Aime M-aeght) 부부는 아들 베르나르가 어린 나이로 죽자 아기의 영혼을 베르나르 성인께 봉헌하고자 기념 성당을 이곳에 짓기로 하고 죠르쥬 브라크에게 디자인을 의뢰하였는데 나중에는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아들 곁에 미술관과 이와 연관된 도서관, 판화 공방미술관계 서적 센터 등을 만드는 것으로 계획이 확장되었다.
건축가는 전술한 르 꼬르뷔지에의 도제이며 발터 그로피우스에게 하바드 대학 시절 수학한 까딸로니아 출신의 호세 루이스 써트(Jose Luis Sert)를 선정하였다.
미술관은 설립 때부터 브라크와 샤갈 그리고 후안 미로와 알베르토 쟈코메티 바실리 칸딘스키 등의 다섯 거장들이 거들고 나섰는데, 이들이 만든 옥외 조형물들은 이 작은 미술관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미술관의 하나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입구에 있는 인공 못의 바닥 타일도 자세히 보면 범상치가 않은데 바로 죠르쥬 브라크의 것이다. 베르나르 성당은 바로 미술관 입구에 있고 내부의 십사처 역시 성 미술이 매우 희소한 브라크의 몇 안되는 귀중한 작품이다.
방스 역시 메그 미술관이 있는 쌍뽈과 지근거리에 있는 산정마을로서 쌍뽈과는 달리 다소 외부 세계에 개방되어 있다. 이곳에는 이번 순례의 하일라이트인 로사리오 성당이 있는데 원래 도미니꼬산상수녀회의 성당이었으나 지금은 워낙 순례자와 방문객이 많아 수도회 소속 성당으로 쓸 수 없게 되었다.
■ 병상에서 예술활동
야수파의 대표 화가 앙리 마티스가 노년에 그의 높은 정신 세계를 화폭이 아닌 건축과 스테인드글라스, 사제의 제의, 그리고 촛대와 십자가에 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았던 증거는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제기되는 의문은 마티스가 어떤 이유에서 생을 마감하는 시기에 건축과 공예로 갑자기 방향 전환을 하였느냐는 것인데 전해져 오는 말은 다음과 같다. 노년의 마티스는 전쟁 중에 지병의 악화로 외과 수술을 받았는데 거의 죽음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이때 간호를 맡았던 도미니꼬산상수녀회 수녀들에게 살아나서 기력이 회복된다면 성당을 직접 설계해서 봉헌 해보마고 약속했다한다. 어떤 연유에서건 이 마티스의 로사리오성당은 한 위대한 예술가의 혼이 깃든 성당이기에 작지만 정말 큰 성당이 되었고 예술을 사랑하고 매괴의 기도를 바치려는 세계인의 순례지가 되었다. 성당 내부의「생명의 나무」를 주제로 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그가 거의 수전증으로 못쓰게 된 손에 가위를 묶어 색지를 오려 붙여 밑그림을 완성시킨 불후의 명작이며 인간 승리의 증거이다.
그가 병상에 누워 막대기에 목탄을 묶어 그린 극명한 선의 윤곽으로만 그려논 십자가의 길과 성 도미니꼬 성모자상은 정말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인가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의문을 낳게 한다.
꺼져가는 생명, 시간과 맞바꿀수 있는 절대의 가치와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방문객으로 붐비지 않은 성당에 혼자 들어와 보았던 옛 기억을 소란속에 조용히 떠올려 본다. 그때는 하얀 순백색의 공간에 노랑과 초록 빛이 가득하였지…
지붕은 니스 앞 바다의 쪽빛을 닮았고 유리 창살은 불꽃처럼 말려 올라 갔었지…
그때 문을 열어준 성당지기 부인의 스카프 색과 입술 연지를 보고 아! 꿀뢰르 드 마티스 불뢰! 루즈!라고 말하니까 얼마나 기뻐하던지…
그 사이 세월이 흘렀고 그 우아한 마담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아쥐르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을까?
방스를 떠나면서 아쉬움이 남아 주교좌 성당을 둘러 본다.
그리스도 탄생에 봉헌된 정말 작은 주교좌 성당에서도 15세기 목공예의 정수를 성가대 좌석에서 볼 수 있다.
들어가는 현관 입구에 있는 낯익은 샤갈의 모자이크「물에서 건져진 아기 모세」는 최근(1979)에 완성된 작품으로 초기에 보인 어두운 색은 아무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모두가 프로방스의 밝은 햇빛 때문인가.
어두운 성당이 갑자기 환하게 보이고…
나는 제단에 순례의 촛불을 봉헌하고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눈의 나라로 숲의 왕을 찾아서…
[세계의 성예술 순례] 5. 마티스의 매괴성당
불타는 예술혼으로 일군“수작”
수전증 앓으며 완성한「글라스」일품
예술을 사랑하며 묵주기도 바치는 순례지로 각광
선의 윤곽으로 그린 십자가의 길 “감동”
발행일1992-11-15 [제1830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