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은 우리들 삶의 뿌리입니다. 농촌의 현실은 그래서 바로 우리 삶의 현실이고 삶의 문제이고 민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농촌을 알고싶어 5년간을 농민들과 더불어 「농민이 다 되어」살다가 온 남학현 신부 (서울 창동본당 주임)의 체험담 제 일성이다. 88년 2월 오랫동안 고대하던 농촌생활을 처음 대할때만 해도 한국의 농촌이、농민들의 생활이 이토록 참담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농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사는 동안『이땅의 사제로서 농촌을 몰라서야 되겠는가』라던 당초의 생각은 사회에서 점차 관심밖으로 내몰리고 있는 그들의 현실앞에서 거창한 구호로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신학교 3학년 여름방학때 현장체험을 통해 나환우 정착촌과 도시빈민들의 생활을 접하면서 남신부는 이땅의 소외된 이들、가난한 이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러다 연구와 1학년때 학부생들의「농활」에 동행、안동교구 다인본당 수산공소에서 난생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보았다. 하루 10시간씩 2주간을 꼬박 논밭에서 보내며 모도 심어보고 담배 재배일도 거들었다. 농활이 끝난후 소감을 묻는 말에 남신부는 햇빛에 그을러 거무스레한 얼굴로『나는 다시오기 위해 왔다』고 자신있게 답했다고 한다.
부제서품후 안동교구 류강하 신부를 만나 이러한 뜻을 의논하였고 사제서품 면담땐 주교님께 농촌생활을 청원했다. 서품후 연희동본당에서 2년간 보좌신부로 있다가 88년 2월 25일 대략 5년간의 예정으로 안동교구로 파견됐었다. 이때 안동교구 사제단도 만장일치로 남신부의 파견을 환영해주었고、남신부는 상주 서문동본당 보좌 신부로 사벌공소를 중심으로 농촌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1년을 보내고 예천본당 주임신부로 2년간을 사목、91년부터 다시 예천군 풍양면내 공덕공소에 자리잡고 금년 10월까지 만 4년 7개월을 남신부는 「농사꾼」 으로서 농민들의 애환을 몸소 겪으면서 살아온 것이다.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농사 짓는 일 자체가 극히 힘든 노동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논둑이 터지지 않을까 자다가도 일어나 달려가야지요、바람불때면 나락이 쓰러지지나 않을까 망졸이며 밤을 꼬박 새기 일쑤고요. 농사를 자식키우듯 한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농촌을 알고 배우러 간 그에게 그곳 생활은 피폐된 농촌모습과 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더욱 극명하게 확인시켜줬다고 남신부는 고백한다. 『농민들은 죽자고 일하며 열심히 살아도 이땅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주변인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잘 가꾸어서 수확해봐야 끝에 가서 남는건 절망감과 배신감뿐입니다.』마을청년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버려 일손은 없고 수확기만 되면 정당한 수매가를 보장받으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이젠 연례 행사쯤으로 인식돼 버렸다는 남신부의 말이다.
언제부턴가『농촌도 잘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이 또한 그의 마음을 언짢게 한다. 과거의 절대적인 빈곤에서는 벗어났지만 도시인들에 대해 갖는 농민들의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다. 『농촌에 TV、냉장고가 있다고 해서 과연 농촌이 잘 살게된 것입니까. 그러는 도시인들의 소비는 어떻습니까. 문화생활이다 뭐다해서 쓰는 돈은 당연하고 다른 물가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쌀값 인상을 억제하는 처사는 말이 안됩니다. 그만큼 농민들의 현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농촌이 이러니 농촌지역 교회실정도 이보다 나을리 만무하다.『안동교구의 경우 91년 교세통계에 의하면 처음으로 전체 신자율이 감소했습니다. 새로 영세하는 신자야 있겠지만 농촌을 떠나는 이가 휠씬 많다는 증거죠. 또 26개 본당예산을 합쳐 한해 교구 총예산이 6억원 정도인데 이것은 서울의 보통 본당 예산과 맞먹는 수치입니다.』농촌과 도시교회 (교구)간의 격차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큰 숙제라고 그는 강조한다.『그렇다고 도농간 나눔은 물질적 나눔이 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우선 인적교류를 통해 도시인들의 농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난 후에 물적 나눔은 저절로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지요. 자매결연 같은 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적 물적 교류를 가짐으로써 지역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두 본당간에 우리 본당 이라는 인식을 넓혀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정말 귀한 은총의 시간이었다고 지난 5년을 되돌아보는 남신부는『이땅에 예수님께서 육화하신다면 바로 농민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남학현 신부에 대한 취재는 본인의 고사 (苦辭) 로 어렵게 이루어졌다.
취재요청을 거절한 것은 자칫 한 개인의 이야기 때문에 농촌의 아픈 현실이 가리워 질까해서였단다. 인터뷰를 마치면서『우리 농촌의 실상을 부각시켜달라』고 재삼 당부하는 남신부의 구리빛 얼굴엔 그래서인지 농민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스며있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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