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높아가고 말이 살찌는 결실의 가을이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신자생활에 조금이나마 생기를 주고 싶어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걱정이 생긴다.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통해 신앙에 도움을 얻지만 때로는 많은 실망을 하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수년 전 성지순례 때는 강론 전체가 돈 많이 내놓고 가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여러사람들이 불평했다. 특히 모두 권해서 많이 참가했던 예비자들에게 성지에 대한 좋지않은 인상을 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순례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주차장 등 시설물이 필요하므로 당연히 헌금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또 성지를 훌륭하게 관리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리하게 헌금을 강조하고 그 돈으로 큰 시설물을 펼쳐놓아 성지가 훼손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순교성지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산을 포기하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생명까지 바친 곳이다. 순교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와 사랑 때문에 겪게 되는 가난, 소외, 그리고 생명까지도 바치는 숭고한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을 말이나 책에서만이 아니라 성지에서 좀더 생기있게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화려한 성전 거대한 탑등도 필요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사람들 마음안에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성지에서 가난과 단순함 그리고 옛모습보다는 큰 건물과 헌금 강조등을 통해 부유함과 물질적 경향을 느끼게 된다. 많은 건물과 여러가지 치장, 개발 때문에 오히려 옛날 그 분들이 걸어가시던 길, 그분들이 늘 바라다 보았을 숲이나 풍경등을 더 보기 어렵게 되었다. 성지에 가서 그분들의 삶의 흔적이나 숨길, 정신을 깊이 느끼기 어렵게 되었다면 성지로서의 생명은 죽어가는 것이다.
성지에 가서 눈을 뜨면 성지가 안보이고, 오히려 눈을 감으면 성지가 보인다는 말은 순례자들을 서글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