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명소로 부각되고 있는 한 곳은 지리산 속에 있는「청학동」이라는 이색적인 유교식 마을이다. 이곳에서는 옛전통을 그대로 지키면서 유교적 도덕ㆍ윤리ㆍ풍속과 옛스러움을 보존, 특이한 생활모습으로 사는 곳으로 유교마을이다.
그래서 오늘날 국내외인을 막론하고 우리나라의 옛관습이나 유교적 생활모습을 관찰하고 공부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청학동 마을과는 종교적으로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교회 안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박해시대 교우촌(敎友村)들이 원형그대로 남아있는 몇몇 곳이 있다.
한국가톨릭역사 안에는 특이한 사건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경이로운 사건 중의 하나가 극심한 박해의 와중에 형성된 교우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교우촌은 대개 신유년교난(1801) 이후 깊은 산속으로 피신했던 교우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신자들의 분포마저 달라졌는데 경기도 충청도 서해안 등지의 교우들이 깊은 골짜기가 있는 차령산맥, 태백ㆍ소백산맥 등지로 흩어져서 깊은 산골에서 화전이나 옹기가마에서 일하면서 생활을 영위했고 교우끼리 마을을 이루어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 명칭들도 높은뫼「峙」자를 넣어서 배티, 한티, 양티, 솔티, 살터 등등의 거의 공통적인 이름도 가졌다. 이와 같은 교우촌들의 교우들은 혹심한 박해 중에서도 교우애로 뭉쳐 아마도 무릉도원 같은 환상적인 마을을 이루어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진다.
이러한 교우촌 형성의 역사가 있었기에 35여 년간이나 성직자가 부재했던 극한상황 속에서도 우리교우들은 스스로 신앙의 불씨를 생생하게 보존했던 것이다. 산곡에 수많이 산재했던 교우촌들은 대개 무진년박해(1868년) 때 많이 소멸되었고 박해가 끝나자 그 후에도 남아있었던 교우촌들은 가까운 도시의 공소나 본당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현재 아직도 깊은 산곡에 남아 있는 몇몇 교우촌이 있는데 예를 들면 전북 진안본당속소의「어은동공소」와 경남 언양의「살티교우촌」등을 들 수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수십가호의 교우들만 살고 있는 전형적인 교우촌으로서 박해 시대의 진한 순교자들의 삶의 향기를 실감할 수 있는 유일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교우촌의 모습은 전 세계 교회사안에서 한국교회만이 가진 유일하고 특수한 형태로서 가히 한국의 가따꼼바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선조들의 삶의 숨결과 순교의 정신이 깃든 장소를 세계의 명소로 지정하여 길이 가꾸고 보존하여 발전시켰으면 하는 제안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