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에게 아가씨라는 말을 꼭 붙혀주시는 환갑의 할머니께서 말벗을 원하시며 저녁에 놀러오셨다. 『내가 아들이 다섯인데 모두 축구다』라는 첫말씀에 축구를 좋아하는 내가『다섯 아드님이 다 축구를 하세요』라고 반가움을 표시했더니 의아한 표정으로『축구다』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시는 것이 아닌가. 「바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인줄도 모르고 어느팀에 속했느냐고까지 반문을 한 진짜 축구에게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쟈 내가 수녀 아가씨들을 쳐다보면 백년 살고 싶고 남편을 바라보면 고마 하루만 살고 저 세상으로 가고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농약을 만져보곤 하는데 수녀 아가씨들은 언제봐도 발걸음이 가볍고, 볼품없는 나같은 늙은이한테도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니 우짠일인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인간 존엄성에 합당한 대접을 갈망하는 할머니의 메마른 가슴에 하느님 생명의 용기를 불어넣어 드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세상, 단련의 장에 살면서 병으로 시달리고 온갖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 내일에 대한 불안 등으로 세상사는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찾아볼 수 있을런지, 일일이 변명도 못할 억울한 사연들에 우리들의 가슴은 또 어떠한가?
그러나 영원히 현존하시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 우리들의 혼란한 마음에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다. 『나는…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있다』(출애급3, 7). 보고계시고 듣고 계시며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수 있는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의 길인 사랑의 삶으로서 세상에 대해 진정한 승리에 이를 것을 재촉하고 계신다. 십자가상에서 당신 어머님의 비탄의 울부짖음을 듣고계셨던 아드님이 아니시던가.
예수님의 고귀한 피가 오늘도 헛되이 흐르고 있음이 너무도 황송해서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는 비오 신부님이 생각난다. 성부께서 원하시는길, 성자께서 따르셨으며 성모님도 동참하고 계시는 십자가의 길을 영광스럽게 빛내어 줄 효성깊은 자녀들을 기다리고 또 목말라 하실텐데….
주님, 세상의 고통들을 통해서 한계에 부딪히며 어두운 욕망으로 인해 악으로 기우는 경향의 이 인간의 진실앞에 깊고 깊은 겸손도 함께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