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의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져 투신했던 지학순 주교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주님의 영원한 안식처로 3월12일 0시 37분 조용히 떠나갔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는 일관된 사목지침으로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강조하며 오로지 정의의 편에 서서 살아온 참 목자 지학순 주교, 그는 생전에는 가시투성이 십자가로 살았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땐 절개된 기도(氣道)로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이 땅의 평화 통일을 위한 보속으로 자신의 고통을 바쳤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언제나 소외받고 억눌린 자의 아버지로 살아온 지학순 주교는 유신의 철권정권에 맞서 민주화의 불을 지폈으며 남북분단의 최대 피해자인 이산가족으로서의 인간적인 고뇌를 겪기도 했다.
가혹했던 유신독재에 분연히 항거하다 내란선동 및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의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던 기막힌 인생여정의 소유자 지학순 주교(다니엘)가 3월12일 0시37분 72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지학순 주교는 1921년 9월9일 노기남 대주교가 태어났던 평안남도 중화군의 중화면 청학동에서 지태린과 김태길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14세에 영세를 한 뒤 성직에의 꿈을 키우기 위해 덕원신학교에 진학함으로서 스스로 모진 가시밭길을 택했다.
지학순 주교는 공산정권에 의해 학교가 폐쇄됨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남한으로 탈출하려다 체포,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50년 1월17일 단신으로 월남,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성신대학에 편입했다.
6ㆍ25사변이 발발하자 국군에 지원 입대한 지 주교는 전투에 참가, 북진하던 중 고향을 찾았으나 어머니는 사망하고 가족은 풍지박살난 채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지학순 주교는 52년 횡성전투에서 부상하여 후송돼 제대하게 됐는데 이때 육군병원에서 남한대 유일한 혈족으로 남아있는 동생 지학삼씨(현재 64세)를 우연히 만나게 됐으며 제대 후 복학하여 52년 12월15일 부산에서 노기남 주교에게 신품을 받아 성직의 길로 들어섰다.
신품을 받은 지 주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첫 부임지로 발령받아 전쟁포로를 위한 전교활동을 벌였으며 56년 로마 울바노대학에 유학, 59년에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교황청에서는 날로 발전해가는 한국교회를 보다 효과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65년 3월22일 춘천교구를 분리, 원주교구를 설정하고 초대교구장에 지학순 신부를 임명했다.
6월 29일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 원동본당에서 교황공사 안또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의 주례로 주교에 성성됐으며 이때부터 교통이 가장 불편한 산악지대와 경제적으로 낙후된 소도시, 농촌, 어촌, 광산촌을 포함하는 원주교구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대변인으로 나서야 했다.
지 주교는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총재와 원주 문화방송 설립 참여, 성바오로병원 개원 등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하게 됐으며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 추방과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에 깊숙이 개입하게 됐다.
전국에서는 부정부패 추방 운동이 거세게 일던 71년 10월18일, 지학순 주교는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불의한 세력과 싸워야 하며 우리 교회는 단합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1월 4일 평신도의 날을 맞아 한국 천주교 주교단에서는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공동 교서를 발표, 그동안 소극적이며 보수적인 성향으로 치부돼 오던 사회적인 인식을 일대 변혁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회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지 주교에게 많은 힘을 주어 노동자, 농민을 위한 대사회적인 투쟁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
지 주교는 72년도부터 국제사면위 한국 이사장, 한국평협 총재, 정평위 총재를 맡아 왔으며 72년 8월에는 원주지역에 폭우가 쏟아지는 재해가 발생하자 「원주교구 재해 대책위원회를 설치, 4단계 재해대책 사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하는 수완을 보였다.
당시 정부는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긴급조치를 선포, 독재의 시나리오를 굳혀가고 있었으며 소위 「민청학련사건」과 관련, 이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명분으로 전격적으로 지 주교를 구속 기소했다. 74년 7월6일의 사건이었다. 지 주교의 죄목은 긴급조치 1, 4호 위반.
이때 본보는 지학순 주교의 강제 연행과 유신독재의 부당성을 알리는 보도로 인해 결간을 당하는 아픔을 지학순 주교와 함께 겪기도 했다.
지학순 주교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풀려나 다시 명동 성모병원에 연금상태로 입원해 있었으며 이때 『지켜야 할 법과 거부해야 할 법이 따로 있다』는 그 유명한 「양심선언」을 발표, 유신암흑기에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이 사건은 교회 내외의 파문을 일으켜 전국 각 처에서 기도회가 개최되고 마침내 9월23일, 원주 원동성당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조직됐으며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사회정의 구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내란선동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과 자격정지 각각 15년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던 지학순 주교는 구속 2백 26일만인 75년 2월 17일에 석방됐으며 건강이 악화되는 80년대 초까지 근 10년간 사회정의와 불의를 위한 투쟁에 자신의 온갖 정열을 쏟았다.
특히 지학순 주교는 85년 9월20일부터 23일까지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사업에 참가해 평양을 방문하고 분단 40년만에 첫 공식미사를 올리는 감격도 누렸으나 누이동생 용화씨와의 상봉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괴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릴 때 함께 손잡고 성당에 다녔던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천국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지금 천국에 살고 있다』는 말에 지학순 주교는 되돌릴 수 없는 충격을 받았으며 이 같은 충격은 오랜 지병인 당뇨병을 더욱 악화시켜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지학순 주교의 건강이 나빠지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구의 모든 업무를 총대리 할 수 있도록 김지석 신부를 교구장 승계권을 지닌 부주교로 90년 11월19일 임명, 원주교구의 사목을 담당토록 했다.
지 주교는 건강이 나빠져 원주군 신림면 용암리 소재 용소막성당에 마련된 거처에서 요양하고 있던 중에도 정행만 신부의 금경축에 참석하는 등 지난해 12월 강남 성모병원에 마지막으로 입원할 때까지 목자로서의 직분에 충심해 왔다.
당뇨와 신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항상 고통스러웠지만 늘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했던 지학순 주교. 지학순 주교는 성 금요일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따라 금요일에 우리의 곁을 떠났다.
◆ 지 주교 연보
1921년 9월9일=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동에서 출생.
48년 3월=덕원신학교 입학.
52년 12월15일=부산에서 사제서품.
52년 10월=로마 울바노대학 유학.
56년 6월30일= 교회법 박사학위 취득.
65년 3월22일=원주교구장에 임명.
65년 6월29일=주교서품 및 원주교구장 착좌.
68년 7월12일=원주 가톨릭센터 설립.
69년 10월5일=군종후원회 초대총재 주교.
70년 7월9일=원주 문화방송 설립에 참여.
72년 8월=원주교구 재해대책 사업위원회 설치.
74년 7월6일=김포공항에서 모처로 강제 연행.
74년 7월14일=지 주교 관련 사건보도로 본보 결간.
74년 8월12일=비상군법회의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각각 선고.
74년 10월7일= 항소공판 최후 진술에서 조국과 교회 위해 몸바칠 각오 피력.
75년 2월17일=2백 26일 만에 석방.
75년 4월=주교회의 산하 인성회 총재 주교.
85년 9월20일=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함께 평양 방문 동생 용화씨 상봉.
85년 9월22일=북한방문 최초 공식미사 봉헌.
86년 11월7일=한국 천주교 사회복지협의회 지도주교.
88년 2월=주교회의 평신도 위원회 위원장.
91년 12월18일부터=지병인 당뇨병 악화로 강남 성모병원 입퇴원 반복.
92년 12월=강남 성모병원에 마지막 입원.
93년 3월12일 0시37분=72세의 일기로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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