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샹을 떠나 일박한 곳은 프랑스와 스위스 그리고 독일 세 나라의 국경도시인 바젤(Ba-sel)이다. 이곳 이름은 내게 7년 전의 에피소드를 생각나게 하는데 그것은 당시 프라이브르그 대학에 연구차 와 계셨던 최창무 신부님을 뵈러 파리 동부역에서 바젤행 기차를 타러 나왔다가 Bare라고 쓰여 있는 객차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기차가 움직일 무렵 황망히 뛰어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던 기억들이다. 즉 불어와 스위스어 그리고 독일어 등 3개 국어로 표시되는 지명을 잠깐 잊었기 때문에 벌어진 소동인데 스위스도시 바젤에는 매우 훌륭한 현대 미술관과 로마서 강해(Romer Brief)로 유명한 20세기의 개신교 대 신학자 칼 바르트가 봉직하였던 대학이 있어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었지만 북쪽으로 가야할 길이 멀어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서 함부르크행의 5번 고속도로 (Auto bahn)로 접어들었다. 평균 시속 150km의 속도감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우울한 날씨의 아우토반에서 듣는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나에게 끝없는 상념과 회상의 날개를 펼치게 하였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칼 바르트의 생애가 나의 학습 태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던 일이 기억난다. 하루의 일과를 모짜르트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으로 시작하곤 했던 그는 일생동안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적이 없고 일흔 살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집 없이 작은 임대주택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의 취미는 참으로 다양해서 르네쌍스 미술 특히 보티첼리의 그림에 관한 전문가였으며 영화광에다 탐정소설 읽기를 즐겨하여 이것으로 영어를 익혔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1956년 바젤에서 개최된 모차르트 탄신 2백주년 기념식의 강연자로 모셔질 정도로 모짜르트 숭배자였다.
그의 서재에는 가톨릭 신자인 모짜르트와 종교개혁자 칼빈이 초상이 똑같은 높이로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만약 내가 천국에 간다면 우선 모짜르트부터 먼저 만나 안부를 묻고 난 후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루터와 칼빈, 슬라이에르마허 선생의 안부를 묻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함부르크 가는 고속도로는 보텐 호수를 발원지로 하고 있는 독일의 대동맥 라인강 유역을 평행하여 북쪽으로 달리다가 다름슈타트 남쪽에서 훨른쪽으로 갈라진다. 이번에 소개할 교회는 대를 이어 교회 건축설계를 하고 있는 건축가 고트프리드 뵘(Gottfried Bohm)의 평화의 모후 마리아 순례성당(Wallfahrts Kir-che, 『Maria, Ko-nigin des Frie-dens』)으로 잡았다.
이 성당이 위치한 곳은 바젤에서 한나절을 가야하는 거리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나는 해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점심도 적당히 차 안에서 때우고 불쌍한 피에스타를 마구 밟아대었다.
마리아 순례성당은 쾰른 북쪽 약 50km 지점의 우페탈(Wuppetal)에서 에쎈(Wssen)가는 길에 있는 네비게스(Velbert-Neviges 라고도 부른다)마을에 있다. 네비게스 마을은 주변에 구름과 산이 많고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쌓여 있는 풍광 좋은 루르지방의 오래된 소읍이다. 인구 2만5천 명정도의 이 마을 역시 독일의 작은 옛 도시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포장된 구불구불한 동네 골목들이 있는 깨끗한 마을의 기품과 고즈넉함을 지니고 있다. 네비게스 마을이 마리아 순례지로 유명해진 복잡다단한 기원은 8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4백 년 전 1681년 6월에 당시 하덴베르그 네비게스로 불리운 이 마을에 인근 돌스덴의 수도원에서 파견된 프란치스꼬회 수사들에 의하여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마리아 상본이 모셔져 옮으로 시작되었다. 이 마리아 상본은 후에 이곳에 안나 성당을 지은 두 명의 남작 부인(베른샤우 가문의 안나와 그녀의 딸 이사벨라 폰 샤에스베르그)이 잘 보존하였고 이곳을 방문 하는 순례자들은 프란치스꼬 수사들과 함께 상본을 모시고 미사를 봉행하게 되었다.
1681년 10월에 파다본의 후작인 페르디난드 주교는 고통받는 병자들이 치유의 은사를 받기 위하여 이곳을 성지로 선포하고 순례를 장려하였으며 뒤셀도르프의 선제후 안 벨렘은 순례성당의 부속 용도로 쓰일 수도원 건축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네비게스 마을이 순례성당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20세기의 뛰어난 교회 건축가 고트프리드 뵘이 같은 장소에서 1964년 3월 이 새 성당의 설계를 착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판단이 옳을 것이다.
마치 순례자의 텐트가 여기저기 펼쳐진 듯한 이 새로운 성당의 지붕모습은 그 재료의 솔직함만으로도 세계인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바위산에 핀 수정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산과 구릉의 중첩된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작자의 말에 의하면 뾰족 지붕은 순례자의 텐트를 암시하는 것이라 한다)
주의 평화(고트프리드의 이름 뜻)가 평화의 모후 성당을 설계한 일도 이채로운 일이지만 2차대전 전까지 독일교회 건축을 대표한 아버지 도미니쿠스 뵘과 함께 고트프리드 뵘은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최고의 교회 건축가이다. 양식사적으로 분류하자면 이 성당은 고덕의 의미를 현대에 접목시킨 독일 포스트 모더니즘의 효시로 불리우고 있는데 고트프리드 자신은 『I am not an ism』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러한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결국 이 성당이 가지는 특이한 형태는 역사적인 마을이 가지고 있는 첨탑과 박공 지붕의 경사면이나 주변의 산악구릉의 중첩된 선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러한 외부형상이 내부에 다시 공간형태로 고스란히 재생되도록 건축가가 그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함으로써 사람들은 경이롭고 감동적인 새로운 공간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 진입로에 놓여진 층층계단이 몇 단계씩 어떤 일정한 조성을 지면서 연속되도록 한 것은 마치 상승하는 물결의 겹침처럼 내게 보여졌다. 이 상승하면서 고조되는 물결을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외부 바닥의 패턴이 실내외의 구분 없이 그대로 내부로 들어와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외부 공간 그러한 평범하면서도 신비로움에 가득 찬 콘크리트 벽과 천정으로 둘러싸인 외부공간에 자신이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러한 느낌은 내부조명등이 마치 가로등처럼 바닥에서 솟아 있게 하는 것 갈은 건축가의 디자인 의도가 중첩되어 더욱 그러한 느낌에 젖게 된다.
감실이 놓여져 있는 부속 성체조배실은 건축가 자신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강렬한 빛으로 붉게 물들여져 있는데 이것은 다른 편에 만들어져 있는 부속 공간에 역시 그가 제작한 요나를 삼킨 큰 고기형상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함께 이 성당의 대표적 유리화이다. 큰고기 형상의 추상 유리화 앞에는 높이 7m 지름 1m 의 통석으로 된 성스러운 기둥(Die Sakrament-ssaule)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성당 내부의 또 다른 마리아 기둥(Die Sakrament-ssaule)을 제작한 조각가 엘마 힐레브란트 (Elmar Hillebrand)의 작품이다.
지하성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유리화 역시 건축가 고트프리드 뵘의 추상적인 작품이다. 그는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죄의 카탈로그를 그리려했는데 모든 인간이 저지른 죄의 카탈로그가 이렇게 아름답다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나는 이 성당의 외부를 보다 잘 보려고 밖으로 나온다. 계단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부속건물은 순례자를 위한 서비스 시설로서 숙소가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윽고 황혼녘이 되자 평화의 모후 마리아 순례성당의 경사진 지붕이 연출하는 강한 음영의 대비가 석양빛에 드러나는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 다가왔고, 갑자기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그만 뒤돌아서고야 말았다. 시대를 뛰어 넘어 같은 교회 건축의 길을 가려는 한 젊은 얼굴에 내비치어지는 뜻모를 질투의 감정과 그로 인하여 귓불까지 붉게 물든 여린 감정을 지우지 못하는 내 초라한 등 뒤로 해가 뉘엿뉘엿 져버릴 때까지 숨을 죽이며 꼼짝 않고 그대로서 있을 수밖에 없었으리 만큼 황혼빛에 쌓인 평화의 모후는 감동 그 자체로 내 앞에 서 계셨다.
[세계의 성예술 순례] 8 평화의 모후 마리아 순례성당
독일 포스트 모더니즘의 효시
고딕의 의미 현대에 접목시킨 걸작
지붕은 순례자의 텐트 펼쳐 놓은듯
발행일1993-03-07 [제1845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