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교회 박해시대에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용기있게 싸웠던 한 예수회 신부가 있었다.
미구엘(미카엘) 쁘로(M-iguel Pro) 그는 1891년 1월 13일 멕시코의 한 부유한 광업회사 지배인의 11자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구엘은 성장기에 겪는 내적 고민끝에 19세에 두 누나처럼 수도원을 지원하게 되는데 예수회를 선택했다.
그후 곧 일어난 혁명으로 예수회는 피난을 하게 되는데 신부들은 미국으로, 젊은이들은 스페인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25년 8월 30일 미구엘 쁘로는 객지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쇠약해진 몸의 휴양을 위해 고향 멕시코로 불림을 받는다.
그동안 멕시코에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해있었다. 칼레스 대통령은 역대 멕시코 대통령들처럼 자유주의자로서 소련을 모방하여 무신론 국가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1926년 7월 3일 공포한 법으로 미운 교회를 말살하려고 신부들은 숨어서 활동했다.
정부의 스파이들은 교회를 감시하고 성직자들을 쫓고 있었다. 멕시코 정부는 신부나 평신도를 총살하고 전신주에 묶어 서서히 죽어가도록 했다.
그러나 쁘로 신부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건강이 좋지않음에도 불구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주고 강론을 하기위해 계속 뛰어다녔다.
그는 특별히 죄수 과 병자들을 자주 돌보았다.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는 돈ㆍ생필품ㆍ옷가지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많은 신부들이 집밖을 나오기 두려워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고있는 미구엘 신부는 위험을 무릎쓰고 헌신했다. 그러나 경솔하게 처신하지도 않았다.
그는 정부의 스파이를 여러번 속였다. 또 여러번 체포된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그의 영리함과 침착성으로 풀려나곤 했다.
젊은 신자들은 전 대통령이며 혁명지도자인 오브레곤 장군을 제거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했다.
이에 정부는 가톨릭신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쁘로 신부와 그의 동생도 곧 체포되었다.
이들을 구하려 진범이 자수를 하였으나 칼레스와 오브레곤은 이미 쁘로 형제를 죽이려 작정했기에 쁘로 형제가 폭탄음모와 아무 관련 없음이 증명되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27년 9월 23일이 사형집행일로 정해졌다.
쁘로 신부는 기자들 앞에서 사제로서, 예수회원으로서 용기있게 자기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사형집행전 국제언론, 외교관, 각 부처 대표들과 많은 장교를 앞에서 쁘로신부는 다시 한번 자기의 무죄를 주장했다.
사형전에 눈을 천으로 가리는 것을 거절한 그는『하느님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느님 이들을 축복하소서… 나는 내 원수들을 진심으로 용서합니다』『그리스도, 왕 만세』란 말과 함께 그는 조용히 기도하며 멕시코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8년 9월 5일 미구엘쁘로 신부를 시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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