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은 싫어하는 사람이 함께 앉아 식사를 할 경우 어떻게 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은 노사제는 한마디로 대답하였다. 『그냥 웃지요』. 만일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와 적개심을 느낄 때에도 정말 그냥 웃지요 하며 답변 할 수 있을까? 증오와 적개심을 느낄 정도면 분명사랑 부재의 역사나 어떤 형태의 폭력을 겪으면서 한이 맺혀 있을진대, 그냥 웃지요 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우리들 주변에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하느님 보시기에도 좋지 않은 현실이 엄연히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오랜 동안 저지를 때 우리는 제도폭력을 체험한다. 비복음적인 일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인간적인 일로 합리화될 때, 또 바르게 고쳐야 할 사람마저 망각하거나 방관할 때, 우리는 절망적인 패배감마저 느끼게 된다. 어떤 대안으로 현실의 불의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첫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먼저 기억하자. 이는 죄와 사람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며 죄로 인한 폭력인 원수를 복수하되 사랑으로 하라는 뜻이다. 원수와 같은 방법으로 말과 행위를 드러내지 말고 끝까지 사랑으로 처신하는 것이다.
둘째, 기억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아우슈비쯔 수용소의 벽에 유대인들이 써놓은 구호가 생각난다. 『용서하자. 그러나 결코 잊지 말자』. 그렇다. 평화를 사랑하는 자의 폭력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는 일이다. 불화가 사라질 때까지, 태워야 할 것을 태울 때까지, 성급하게 굴지 않고 기억으로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우리는 그 분에 비하면 아마추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폭력을 뿌리채 뽑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우리를 빌려 드리는 것이다. 우리도 죄에 물든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를 휘둘러야 한다. 높은 데에서 멀리 보는 정신으로 불의를 씻어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