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일어나는 갈등과 잘못, 실수를 대할때마다 용서와 화해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나 잘못된 용서와 화해는 문제의 본질을 숨겨주고 더욱 큰 독소가 자라나게 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인격(Persons)과 사실(Factum)은 명백히 구별돼야 한다. 예를 들어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선한 사람인가 하는 점이 그러하다. 벌거벗은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하고 잘못된 진상을 밝히고 교정하는 방향에서 노력하는 모습이 없다면, 착한 사람일지라도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착한 심성을 바탕으로 싸워야 할 것을 방관한다면 그는 착한 사람이지만 선한 사람은 못 되는 것이다. 착해빠진 것뿐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선한 이에게 평화」인 것이다. 벌거벗은 사실과 진상 규명이 없이 등장하는 용서와 화해, 일치 등은 위선인 것이다. 어찌 잘못한 자가 없는데 용서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방치한 채 복음적인 덕을 내세울 수 있는가? 그것은 명백히 거짓된 덕(德), 또는 가장된 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진실이 없는 곳에서 등장하는 하느님의 뜻과 계시를 우리 신앙인들은 조심해야 한다. 역사성 없는 초월성을! 자칫하면, 「종교가 아편」이라고 주장하는 칼 막스의 논리가 우리의 신앙 현실에 적용되지 않기를 우리는 깨어 보아야 한다.
은혜와 조작, 반역의 역사위에 울리는 위장한 덕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허위의식(이데올로기)중 가장 심각한 종교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런 종교 이데올로기는 참 하느님을 찾고 있는 구도자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이럴때는 율법과 제도가 흐트러진 공동체의 질서를 잡는 도구로써 강력하게 나타난다. 소위 보수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카리스마를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제도는 그 자체가 하느님으로 둔갑되고, 참된 하느님을 기릴 수 있다고 여기는 교만인 것이다.
천주교 신자가 줄어들어 가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더욱 교회 쇄신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고 외쳐야 한다.
『껍데기는 가라. 하느님만 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