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신앙생활이 안돼요』
『신부님, 미사가 형식적인 것 같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어요』
『신부님, 고백성사는 꼭 해야 하나요』
『신부님, 기도를 시작하기만 하면 온갖 분심잡념이 생겨서 기도를 계속할 수가 없어요』
이런 대화나 질문은 그래도 좀 낫다.
『신부님, 저는 죄가 너무 많아 성당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정리되면 그때는 꼭 나가겠습니다』
이제는 아예 자신이 저지른 죄마저도 하느님을 회피하는 도구가 된다. 어디 하느님께서 자수의 윗면을 보셨지, 자수 뒷면에 뒤집혀 빠져나온 실을 탓한 적이 있었는가. 잘못했다고, 잘 안된다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사람보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사람이야 말로 구원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뭐 우리가 천사인가? 인간인지. 발을 땅에 딛고 다녀야 할 사람인 것이다.
종교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통계를 발표한 적이 있다. 얘기인즉 『슬픈노래를 3천 번 이상 부르면 슬픈 영에 사로잡혀 인생마저 슬퍼진다』는 것이다.
슬픈 영이라는 표현이 다소 어설프기는 하지만 성령으로 부터 오는 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래서 안된다. 저래서 안된다. 끊임없이 부정적으로 핑계대고 변명대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정녕 어둡다는 사람은 많지만 촛불을 밝히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어둠은 결코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신앙은 감정이라기보다 의지이다.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을 끊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그분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다. 나에게 펼쳐지는 생명의 시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끊임없이 반복하고 의지적으로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기쁜 노래를 지금 이 순간 부를 줄 아는 자만이 진정 슬픔이 무엇인지 알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