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과 종교가 서로 결탁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혁명 초기부터 거의 당연한 것처럼 활기 있게 일어났던 반 성직주의적인 세론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왕권의 무너짐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권력과 결탁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종계에게도 전자가 입은 타격과 비슷한 손해를 입게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정상적인 질서로 복귀 되는 과정에서 교회도 마침내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과 나폴레옹 제국의 마지막 기간에 직면한 문제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즉 극단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정책에 쉽게 동조하지 않은 성직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반 성직주의적인 법과 전체주의적인 나폴레옹 방식을 사용하였다.
왕정주의자들은 예수회 회원들과 교육에 있어서 성직자들의 영향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반 성직주의의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즉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적도 일시적으로 자기 편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워털루(Waterloo) 전쟁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종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15년 간이나 지속된 반 혁명운동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합법적인 유일한 세계 질서로 생각되었던 원래 그대로, 즉 왕조적인 옛 체제의 질서에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반 혁명주의자들은 교회를 정통왕조주의 질서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하나로 생각하고 과거의 체제 질서로 완전히 복귀하는 데 있어서 교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교회 사명의 본질적인 요소를 인정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필요에 따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여간 교회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새 시대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영적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음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여러 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에서 공적으로 인정 받는 사회적인 지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니 즉, 성직자는 보다 존경스러운 인사로 여겨졌고 교회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의 새롭고 다양한 편의를 제공 받았다.
신학교는 다시 신학생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과거처럼 권력지향적인 목표보다도 사도직에 대한 열성으로 많은 사제직 성소자가 신학교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한때 박해로 인하여 활동을 중지했던 수도회들이 재등장하고 교육사업도 그들에게 다시 맡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변화된 새 시대의 상황을 필요로 하는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하여 새로운 수도회들이 창설되어 이들에 의해「선교」라는 형태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복음화 운동이 활기 차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갈리아주의자들과 교황권 지상주의자들, 이탈리아에서는 온건파와 비타협파가 서로 비난하는 등, 일부 가톨릭 신자들끼리 분열되어 서로를 비난하는 상황도 일어났지만 일반적인 추세는 교회의 영적 가치가 우선적으로 존중되고 쇄신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역에 따라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재부흥 운동에 참여하는 여러 국가와 지역의 주역들이 서로 비슷한 이념을 가지고 교회에 봉사함으로써 교회의 내적인 일치와 영적 쇄신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마침내 영적인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속의 어떠한 권력으로부터도 위축되거나 통제 받지 않고 독립적이어야 하는데 이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교황권의 중요성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교회를 박해하는 대신에 정치제도는 아주 호의적이었지만 결과는 항상 그대로였다. 즉 정치권의 교회에 대한 호의는 정책 추진을 원활하게 하는데 따르는 필요성 때문이지 교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교회를 권력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려 할지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자체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교회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세속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아주 미묘한 일이다. 사실 교회에 호의적인 정치 세력이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쉽게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제반 사항에 개입하여 어렵게 하면서도 그들이 암암리에 저지르는 반대의 동기가 모든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정치와 종교가 각자의 사명에 걸맞는 역할과 기능의 한계를 넘지 않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 역사의 전향적인 발전에 서로 동참하게 될 것이다.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 위에 군림하려 할 때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혼란을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와 종교는 상호보완관계의 동반자이지 적대관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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