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쌍뽈(St. Paul)에서 롱샹(Ron Chanmp)까지 가는 길을 장황하게 그려가면서 샤모니(Charmonix)를 경유하였는데 그렇게 노정을 잡은 연유는 샤모니 근처 몽블랑(Mont. Blanc)을 마주보는 위치에 이 산만큼이나 유명한 현대 성미술사에서 귀중한 보석처럼 빛나는 작은 성당이 알프스 산록에 조용히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노뜨르담 드뚜뜨 그라스(Notre Dame de Toute Grace)「은총이 가득하신 성모성당」으로 불리우는 앗씨의 성당은 메제브에서 샤모니 가는 길목에 갑자기 웅혼한 알프스의 대협곡과 흰 눈을 머리에 인 고산준봉이 눈에 들어오는 상 제르베(St. Gervais)의 아랫마을에서 꼬불꼬불한 찻길로 한 40분정도 올라가는 거리에 있다. 방향은 샤모니 쪽으로 들어가다가 입구에서 협곡을 가로 질러 몽블랑과 반대 방향의 피즈(Mont. Fiz)산 기슭으로 접어들어야 한다(기차로 오는 사람은 리용에서 쥬네브를 거쳐 샤모니 가는 기차를 타고 상제르베 역에 내린 다음 쁠라토 닷씨 행의 버스를 타면 된다).
소박한 산골교회
건축적으로 보면 앗씨의 성당은 전통적인 사보이 지방의 박공 지붕양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눈이 많은 이 지역 기후 특성에 맞도록 튼튼하게 지어진 평범하고 소박한 산골의 마을 교회이다. 이곳은 불란서 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8C말까지도 사보이(Savoy)공국에 속하였던 관계로 앗씨 고원이라는 이름의 쁠라토 닷씨(Plateau D’assy)마을로 높은 사브와(Hasst-Savoie)라는 옛 지명을 지금도 함께 쓰고있다. 앗씨의 성당은 1937년부터 1946년까지 9년 동안 지어졌는데 이 기간은 20세기 인류가 감내해야 할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었고 서구 문명의 몰락과 인간의 야만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고통스러운 나날에 성당 건립자인 사목위원 드브미(Devemy)는 20C 최대의 성예술 애호가이자 지도신부인 알랭 꾸뛰리에 신부와 함께 정말 꾸뛰리에 신부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천재들의 작품에 내기돈을 건 것』이다.
예수의 혈통 형상화
페르낭레제는 성당 전면의 벽 전체에 모자이크로 기도서에서 인용된 상징적인 모티브들 즉 신비로운 장미, 샛별, 예지의 권좌, 다비드의 탑과 성궤 등을 표현하고 그 한가운데 동정녀의 현신이 이중으로 빛나는 후광의 광채 속에 감동적으로 나타나도록 구도를 잡았다. 이 정면벽의 모자이크는 전면에 돌출되어 서있는 돌기둥과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회랑에서 느끼는 신비의 기호일 뿐만 아니라 황혼무렵 석양의 햇살을 담뿍 들여 마시고 멀리서 찾아온 순례자를 따뜻하고 밝게 맞이하는 대범하고 순수한 색채의 구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데, 처음 맞닥뜨리는 교회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페르낭레제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빼어난 풍광중의 하나인 알프스라는 특징적인 풍경에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일치시키므로서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이곳에 추가시키는 기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위가 반원형으로 된 나무 문을 열고 성당 안에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절로 탄성이 터져나오는데 이것은 제대 정면 상부에 둥글게 내려져 있는 뤼크라(Lucrat)의 타피스트리 때문이다. 이것은 환성과 환영을 보는 작가의 작품이라 불릴만한 것으로서 전체적으로는 검은 색과 흰색, 붉은 색과 녹색 바탕위에 여러 가지의 뒤섞인 색들로 칠해진 현란한 형태들이 불빛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이것은 요한 묵시록 12장에 묘사된 최후의 결전날에 여인과 용이 맞닥뜨리고 있는 장면임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뤼크라는 히틀러 같은 무시무시한 붉은 용과의 싸움에서 인류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마음으로 즉 성 요한의 예언대로 악의 파괴력에 맞서는 교회로 묘사된 여인상을 정말로 간절히 원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벽걸이 하단부에서 비틀거리는 용을 창으로 격퇴하는 승리의 성모를 묘사한 것(이사야 27, 1)에서 그의 기원을 더욱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뤼크라는 성서에 대한 깊은 지식과 해석으로 양쪽의 붉은 바탕과 초록바탕의 천에 이사야서에서 나오는 예수의 혈통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이새(jesse)나무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의 눈을 이곳에서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하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상징이다.
뤼크라의 타피스트리의 현란함 때문에 이 성당의 하일라이트인 제르멘느 리쉬에(Germaine Richier)의 십자가를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 불에 타고 그을려서 사지가 오그라들고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이 뭉게진 마치 히로시마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폭 중심에서 발견된 시신의 형상과 같은 모습은 보는 이를 진저리 치게 하는 섬찟함이 있다.
비틀리고 가닥가닥 찢겨져 마치 나무껍질처럼 꺼칠꺼칠한 육체는 고통에 신음하는 자신의 몸을 앞으로 약간 구부리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청동 주조물속에서 표현된 이사야가 본 신의 비장한 모습이다.
리쉬에의 십자가는 발표 당시 성미술과 신학상의 대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은 도저히 이러한 참혹한 십자가를 달아서는 안된다는 여론 즉 『사람들은 이 십자가에 몸서리를 친다. 리쉬에가 그린 그리스도의 모든 형상은 왜곡되어 있다. 인간적인 외양은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고 마치 메마른 대지에 박힌 나무뿌리 같다. 최소한의 아름다움도 광채도 없다. 즉 경멸과 쓰레기처럼 보이는 대상이며 아무리 좋게 해석하여도 고통으로 가득찬 고뇌의 인간 그 자체일 뿐이다』라는 반대의견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리쉬에는 예술가 이전에 이 시대의 예언자의 눈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라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을 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극에 달한 고통의 순간에서도 리쉬에의 십자가는 여윈 두 팔로 무엇인가를 안으려는 부드러운 몸짓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으로 반 구상적인 소조물의 이 십자가는 사랑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명상으로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그 분은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주제야말로 비극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리쉬에의 십자가가 부드러움과 안도감을 발산하는 근원인 것이다.
경탄 자아내는 감실
이 고통받는 예수를 염두에 두고서 조류주 루오(Georges Rouault)는 현재 건물 내부의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였다. 그 중 두개는 예수 수난 장면인데 피에타와 태형을 받는 예수를 그리고 있다. 왼쪽 측랑의 예배실에서는 그가 즐겨 그리는 순수하고 신비한 우아함이 섞인 베로니카 성녀(그의 딸을 모델로 한 것이었지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종교적 주제와 관계없는 듯한 꽃병에 꽂혀있는 꽃다발의 유리화이다. 이 그림들의 아래에는 『그는 학대받고 억압받았다』와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라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명백히 신약의 수난을 암시하는 구약의 짝이 되는 문장인 것이다. 유리화는 루오의 것 말고도 바잰느(Bazaine)와 샤갈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꾸뛰리에 신부의 작품도 있다. 또한 샤갈은 대리석 부조 두 점을 이 성당에 남기고 있는데 역시 성서를 주제로 한 것이다.
시뇨리(Signori)의 성수반이나 브라크의 감실문 역시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만한 것이기는 하나 성수반이 있는 기도실 벽에 있는 겸손한 샤갈이 모자이크 위에 그린 그림(홍해를 건너는 모세)과 성당 좌우의 측랑 정면 벽에 그려져 있는 마티스의 거만한 기법으로 그린 성 도미니크 상이나 알 수 없는 마을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보나르가 그린 살르의 성프란치스코의 그림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뉘앙스를 남기는 지고의 예술품들이다.
병자위한 자비의 성전
앗씨 성당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교회는 예술가들의 재능이 곧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천품이며, 인류 공통의 유산임을 깊이 통찰하여 신자와 비신자의 예술가를 가리지 않고 당대 최고의 재능을 지닌 예술가에게 이 교회의 성 미술을 맡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써 앗씨의 성당은 고원위에 서 있는 병자들을 위한 자비의 성전으로써의 역할 뿐만 아니라 여러나라의 방문객이 쇄도하는 순례의 명소가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신앙심에 이끌려 이곳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미술을 감상한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이 성당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놀라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진정한 교회의 이상을 찾아내며 경배와 전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되는 것 또한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거듭되는 은총의 신비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산을 오르며 노래할 것이다.
장차 어느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있는 산이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 들리라.
그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서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으로 하느님이 계신 성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워 그 길을 따라가자.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이사야 2, 1~3.5).
[세계의 성예술 순례] 7 은총이 가득하신 앗씨의 성당, 성모성당
알프스 장관과 예술미 조화“일품”
인류구원 위한 성모업적 묘사 장엄
병자들 위한 자비의 성전…참교회상 보여
신음하는듯한 리쉬에 고상 감동적
발행일1993-02-07 [제1841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