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정 한무숙 선생님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입니까
아직도 하실 일 많으시다고
무엇보다도 오따 쥴리아를 기어코 써야만 한다고
병상에 누워서도 초롱한 말씀으로 되뇌이시던 당신이
이렇게 서둘러 쥴리아의 나라로 떠나실 줄이야
당신께 마련하신 하느님의 시간표가
이다지도 가차없는 것임을 미처 몰랐습니다
불과 월여전 선생님은 상고를 당하고
슬퍼하는 저를 위로해 주신다고
제일 비싼 집에서 제일 비싼 불란서 요리를 시켜주시며
슬퍼하지 말라고, 건강 조심하라고 위로하시더니
어쩌자고 당신께서 이처럼 서둘러 떠나십니까
날씨 따뜻하면 선생님 모시고
그날의 고마움을 갚으리라 벼르기만 하다가
끝내 그 시간 주시지 않고 그냥 가셔서
어디가서 이 마음의 빚 갚으오리까
선생님 50년도 더 전 내가 태양신문
문화부 기자시절
선생님의 소설 「역사는 흐른다」가
날마다 신문에 연재되었을 때
나는 당신이 그린 그림과 당신의 글을
한 자 한 자 읽으면서 교정을 보던 일이
선생님을 알게 된 맨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50여 년 선생님의 문학은
한국 문학의 한 이정표를 세우고
우리의 아름다운 고유의 언어를 최후로 지키시며
최근에 이르러선 지극한 신앙적 사명감으로
한국 천주교 수난의 역사를 집필하시느라
당신의 지병은 더욱 악화되셨습니다
문학에서도 생활에서도 완벽주의자이신
당신은 청교도적 결벽성과 유교적 부덕으로
우리시대 마지막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니
날마다 날마다 분통처럼 가구를 닦으시고
집안을 꾸미시고
20년 30년된 찻잔을, 구두를, 옷을 자랑하며
아끼시고
새 지식 새 이론엔 앞장서 귀 기울이시는,
진실로 총명과 예지와 선구적 기상의
정숙하고도 명민한 여인의 상징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한 올 흩으러짐이 없으시던
한 떨기 백합처럼 맑고 청아하던 그 귀품
그 부덕,
이제 어디가서 만나오리까
만나면 따뜻한 형님같고
언제나 낭낭한 목소리로 아픈 기색 결코
드러내지 않으시던
그 초롱한 목소리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이제 그 목소리 지상에서 사라지다니
선생님, 향정 한무숙 선생님
이제 정녕 작별의 시간입니다
진실로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영광은 들에 핀 풀꽃 같으니
주의 입김 한번 스치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하였습니다
지상의 온갖 생명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있고
만날 때와 헤어질 때가 정해져 있으니
하느님 만드신 이 엄연한 시간표
누가 감히 어길수 있으오리까
피할수 없는 순명의 시간 앞에 서서
간절히 비오니 주님, 자비로히
이 불쌍한 영혼을 위로하시고
천상 낙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 나라에도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열매 익는 오솔길에 낙엽도 쌓이리니
선생님, 멀지않은 날에 우리 그곳에서
다시만나 그립고 그리운 정 풀게 되오리다
향정 한무숙 선생님, 이제 정녕 편히
쉬소서
사랑하는 가족들 뒤에 두고 돌아보며 돌아보며
구만리 하늘길 떠나가시는
우리시대 마지막 여인상
향정 한무숙 선생님
1993년 2월3일
홍윤숙
<시인ㆍ가톨릭 문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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