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선풍이 불고있다. 꼭 17년 만이다. 1975년 월남이 패망한후 금기처럼 되어온 베트남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물꼬가 터진 격이다. 그 베트남엘 갔다. 상봉하러 가는 대열에 시쳇말로 꼽사리로 묻어가게 된 셈이다. 아직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 베트남의 입문은 그래서 조심스러웠고 다소는 흥분되었다. 그러나 지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속에서 우리와는 끊을 수 없는 연을 맺고있는 나라, 베트남은 전혀 낯설기가 않는듯했다. 그곳에 우리의 핏줄, 우리의 2세「라이 따이한」들이 살고있기 때문일까. 아픔과 연민, 사랑과 책임이 교차하는 시간속에서 베트남취재는 이루어졌다. 제한된 시간속에서, 또 허락된 공간속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취재를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이루어진 취재를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죄송스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베트남 취재동안 줄곧 해야했던 일은 내 삶에 대한 반성이었고 그것은 우리 교회와 공유해야할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에서 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엄청난 도전을 분명히 보았다. 인간의 삶이 얼마만큼 처절할 수가 있는지도 보았다. 그것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아니 반드시 나누어야만 한다. 「다시 열리는 베트남, 그 현장을 가다」는 ①봉인된 십자가 ②닷신부와 민소녀 ③눈물의 교회, 희망의 교회 ④따이한 2세, 누가 그들을? 순으로 게재한다.
6월24일, 흥콩에서 갈이탄 비행기가 1시간50분을 날았을때 작은 성냥갑 모양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탄손누트」공항이었다. 한바탕 스콜이 뿌려 댔는지 탄손누트(현지인들은「탄손얏」으로 발음)공항은 상상 밖으로 시원했다. 섭씨 40도를 육박할 것이라는 사전정보에 지레 겁을 먹었던 터라 30도를 넘는 더위가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시원한 바람을 뒤로 맞으면서 들어선 공항 입국청사.
1백여평이 채 못되는 입국장에서 우리가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비자를 발급받는 일이었다. 베트남 취재의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베트남의 나환우를 만나러 한국의 나환우들을 대동한「성라자로마을」원장 이경재신부와 더불어 우리는 세련되게 우리의 비자서류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우리의 세련이 비생산적인 일임을 알아챌 수 밖에 없었다. 입국장에는 우리처럼 비자가 필요한 손님들을 위한「대서방」이 바로 문앞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당 (頭當) 1달러라는 극히 미소한 투자로 비자를 획득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우리 앞에 닥친 것은 첫번째 시련. 우리가 보유한 막대한 (?)외화가 탄손누트공항 입국장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었다. 이미 초청과정에서 한국의 나환우가 신자들이 베트남의 나환우들을 위해 성금을 모금, 전달하는 목적을 분명히 했음에도 이 공식성금은 그들의 시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우리는 베트남으로 화려한 입성을 하고야 말았다.
신부님의 유창한 영어도 빛을 발하지 못한채 우리의 동료, 3명의 나환우들조차 지갑속까지 까뒤집어 보인 후에야 겨우 서류심사를 통과한 우리는 흐르는 땀을 미처 훔치지도 못하고 제2라운드의 벽앞에 마주서야만 했다. 신부님의「미사가방」이 문제였다. X레이투시기에 나타난 새까만 성작, 그리고 나무십자가를 놓고 그들은 한참동안 토론을 벌였다. 20대 미만으로 보이는 여자 세관원은 유별나게 깐깐했다. 그녀는 십자가를 처음 보는듯했다.
마치 못볼것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쌀을 찌푸린 그녀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내린 결론은 우릴 경악시켰다. 「십자가」와「성작」이 그녀에 의해 희뿌연 비닐속에 감금돼버린 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몇번씩 다짐을 주었다.
『이 봉인된 물건들을 베트남안에서는 절대 개봉하지 말 것』이 그녀의 거듭된 경고였다.
이미 압수당할 것으로 포기했던 우리는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봉인된 십자가일망정 되돌려 받는 것이 너무 기뻐 환호라도 지를뻔 했다. 더욱이 흥분한 그녀는 성경책 밑에 조용히 숨어있던 진짜 성작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가 봉인한 성작은 이른바 여분의 것이었다. 우리의 기쁨이 클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비닐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베트남 체재기간동안 매일의 미사를 통해 우리와 만났다. 「봉인된 십자가」,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베트남교회의 상징 같았다.
더구나 6월25일 새벽, 호텔방에서 조용히 미사를 봉헌한 우리에게 이 봉인된 십자가는 무수한 묵상거리를 제공했다. 한국교회, 북한의 교회 그리고 월남의 교회를 위한 특별지향의 이 미사중 비닐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월남교회전체를 위한「희생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봉인된 십자가가 상징하는 월남교회의 한 단면은 27일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참석한 호치민교구 사제서품식에서 다시 한번 볼수가 있었다. 43명의 새 사제가 탄생할 것이라는 사전 정보를 토대로 제단위에 정렬한 사제수를 헤아려 봤지만 새사제는 37명이 전부였다.
6명의 사제후보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 의문은 쉽게 풀렸다. 6명 사제후보의 걸림 돌은 다름아닌 성분이었다. 새 사제를 탄생시키는 최종 결정자는 본인도, 교회도 아니었다. 바로 베트남 정부였다. 성분불량으로 수년씩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제후보자수가 받지 못하고 있는 사제후보자수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샛노란 제의를 걸치고 새롭게 출발하는 이들 새사제의 행로가 봉인된 십자가의 오보랩 되면서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영민이 솟아 올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두어깨에 미래의 베트남교회가 달려있음을 함께 보았다.
계속 큰폭으로 늘고 있는 베트남의 사제성소, 수도성소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고 그것은 그 누구도 어쩔수 없이 다가오는 베트남의 희망처럼 보였다.
베트남 방문기간중 우리는 분명 자유를 누렸다. 제한된 자유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수가 있다면 우리가 누린건 자유였다. 그러나 이「미완성의 자유」는 서글품속에서 늘상 우리를 따라다녔다. 베트남 취재 기간동안 마음 밑바닥을 흐르고 있던 이 서글픔은 봉인된 십자가가 자유롭게 숨을 쉬는 날 함께 사라질 것은 분명한 이치다.
이 자유를 위해 우리의 작은손을 내밀어야 할것이다. 조용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다시 열리는 베트남 - 본지 이윤자 취재국장 그 현장을 가다 (1)
움트는「미완의 자유」…개방 기운 물씬
입국장서부터 십자가ㆍ성작 봉인
서품자도 정부승인 받아야… 희비 엇갈려
「비닐속의 예수」현교회 상징인듯
발행일1992-07-12 [제1813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