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성제를 지낸 어느날 상당히 기분이 나뻤고, 그날부터 침울한 한주간을 보냈다. 86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의 일이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몸이다』『나는 지금 삶의 전부를 봉헌하고 있는가?』『예수님이시기에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 영원하시겠지만 저는 싫습니다.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그 다음 한주간의 미사는 더욱더 고통스러운 미사였다. 또 한주간이 흘러갔다. 나는 끝내『예! 할 수 없습니다. 온통 다바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 기쁜 며칠을 보내고나서 생각했다. 『나의 제2 성소는 무엇인가?』『나의 전부를 바쳐서 삶을 사는 길은…』『그것은 수도자의 생애구나』하는 생각에 잠겨 한달을 지내면서 초대 교회사막 교부들의 생활과 동ㆍ서방 은수자들의 수도원 역사를 공부하면서 마음에 뜨거운 감동과 흥미진진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본당생활을 떠나야 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주교님에게 이런 뜻을 말씀드리면서 안식년을 청했다.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나는 내 길을 살펴 당신의 영을 따라 발길을 돌렸나이다』(시118, 56 최민순 신부 역)
떠난다는것, 이것은 아주 소중하고 아픈것이며 또 하나의 죽음이다. 아주 잘되어 가는 중요한 성장기에 그것에서 손을 뗀다는것, 뚜렷한 후계자없이 떠난다는 것은…. 인디애나주로 향하는 차안에서 석양이 붉게 타는 것을 바라보며 차디찬 침묵속의 눈물을 느꼈다. 「정의란 이다지도 치사한 것인가?」「사람이 하는 것 보다 하느님이 하는 것이 훨씬 낫다」란 성경말씀을 애써 믿으려 했다. 수도원중에서도 창립자의 정신을 가장 잘 간직하고 살고자하는「트라피스트」수도공동체에 187년 10월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날 입소했다.
약 40일간 그곳의 수도승과 꼭 같이 생활했다. 제일 어려운것은 새벽 3시에 기상해서 기도하는 일이었다.
성무일도를 노래하는데서는 생소한「나」를 보았다. 아침 8시15분 미사마칠때까지는 관상시간이었다. 몇일을 고생하며 갖은 수난을 겪고 꾸중을 듣다가 15일 정도가 지나자 약 4시간 동안의 아침 기도 시간에 깨어있는 내가 되었다. 그곳서 생활한지 25일쯤 아침기도 시간에 맛을 들일수 있었고 30일이 지나서는 그 기도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만물이 깨어나는 아침, 태양이 솟아오는 오염되지 않는 아침에 주님을 향한 찬미는 말로 표현하기에 앞서 신비롭기까지 했다. 『이렇게 좋은 시간에 허구한날 나는 잠만 잤구나!』『나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다』사제의 신분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란 확신을 하게 되면서 무척이나 당황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심저에서 솟아 나는 것 같은 기쁨이 고요히 나를 감싸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