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부로서 엄마노릇을 해야할 때가 있었다. 휴가중에 장례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보니 눈 뜨고 볼 수 없는 측은한 사건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젊은 부부가 밤늦게 차를 몰고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를 내서 아내는 즉사했고 남편은 치명상을 입고 의식불명중에 응급실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섯살된 사내아이와 열살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시간에 친척집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의 사고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먼저 병원에 가서 아빠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상가집을 방문했다. 그 집에 들어가서 친척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남자아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장난감 총을 나에게 겨누며『빵빵!』하고 총쏘는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플룻을 연주하며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 플룻 악기 소리가 왜 그리 처량하게 들렸던지? 엄마의 죽음도 아빠의 고통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식 날이 되었다. 여자아이는 엄마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남자아이는 아직도 모르고 장례식장을 뛰어 다니며 장난치고 있었다. 남자아이가 엄마의 시체를 보고도 믿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장례날 시체의 상반신을 볼 수 있게 관 뚜껑을 열어놓는다). 누나가 울고 주변사람들이 우는걸 보더니 드디어 그 어린아이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 졌다. 장례식장은 울움바다가 되었다.
나는 신자들에게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강론했다.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린 자식 두 명을 보내주셨습니다. 엄마를 잃고 아빠도 식물인간이 된 어린이들에게 우리는 엄마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엄마를 필요로 하는 이 애들에게 우리는 엄마 노릇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오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잠시 진정되었던 장례식장은 또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다.
다음날 나는 그 집에 가서 두 애들을 데리고 나왔다. 먼저 장난감 가게에 가서 꽤 비싼 오락기계와 장난감들을 사주었다. 그리고 햄버거 집에 가서 햄버거와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었다. 그 다음 날은 큰 애만 데리고 나와 다른 불우한 어린이들 몇명과 함께 극장에 영화구경을 갔다가 오락실에 들러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며철후에는 큰애가 학교에서 파티를 하는데 파티옷이 입고 싶다고 해서 사주었다. 또 며칠후에는 복사들만 갈 수 있는 스키여행에 참여시켜 주었다. 그후에도 거의 매일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함께 놀았다. 할 일이 많아졌다. 바빠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 애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보고싶어 졌다. 몇개월후에 그 애들은 멀리 이사를 떠났다. 몹시 보고싶고 그리웠다. 엄마 잃은 슬픔을 이기고 정상적이고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화살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친척이 엄마 노릇을 해주고 있다니 다행이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