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통을 거부할 수 없다. 고통을 거부하다 보면 삶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마치 슬픔을 못 느끼는 자가 기쁨도 느낄 수 없듯이, 고통과 세상살이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인가 하느님도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실 때는 고통당하며 슬퍼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오셨다. 그러고 그분은 고통을 받으며 슬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셨다(마태 5, 4). 슬픔 자체가 아닌 슬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것이다』(묵시 21, 4).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통을 거부하는 현상들이 판을 치고 있다. 우리는 육체의 고통은 진통제로 마음의 고통은 소비와 향락이라는 환각제로 마비시켜 가고 있다. 동시에 갖가지 신흥종교들은 현실 거부의 교리로 현실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사는 사람들를 현혹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인들조차 십자가는 거부하고 영성적 위안만을 추구하는 기도와 집회에 집착하려는 경향이 짙다.
오늘을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악으로 인한 고통에서 인류를 구원해 내실 수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도외시되는 현실을 아파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마땅히 슬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마리아의 노래(루가 1, 46~55)』와 묵시록의『새 하늘과 새 땅의 찬가(묵시 21, 3~5)』를 불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이 송영들을 부르고 있는가?
수도생활을 택할 때, 그 원인도 모르면서 나는 막연히 이 생활에서 기쁜 일보다는 고통스러운 일을 더 많이 만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자신도 없으면서 감히 나는 앞으로 만날 고통들을 내 것뿐만 아니라 남의 것까지도 피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었다. 나의 스승이 가신 길이 인간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얼싸안은 십자가의 길이었기에, 그분을 추종하는 나의 기도는 이날까지『주님, 제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비록 슬퍼하는 사람이 될지언정 남을 슬프게 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들지 않게 해주소서』이다. 진심으로 나는 오늘 마태복음 5장 4절의 축복을 새해인사로 받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