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밖에서 생활하는 동안 사제로서의 활동은 숨어서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날 때는 신자들조차 임 신부의 행선지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임 신부는 4복음서를 필사본으로 여러권 만들어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 신부의 측근들은『신부님은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시다. 중국은 성경이나 기도서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임 신부님은 감옥에서도 암기된 성서를 똑같이 베껴내곤 했다. 뺏으면 쓰고, 뺏으면 쓰고…당국은 성서를 뺏을수는 있었으나 신부님의 신앙과 영혼은 뺏을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1983년 12월 임 신부는 공안 당국에 붙잡혀 또 다시 6개월의 감옥생활을 한다. 이때 임 신부는 심장병을 얻어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임 신부는 심장병 치료차「하얼빈」에 갔고 여기서 감시의 눈을 피해 지하교회로 숨어 신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 하얼빈교구에서 조선인 신부로서는 임 신부가 유일했으며 임 신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다.
1985년 6월25일 박태수(바오로) 회장의 도움으로 임 신부는 사제서품 금경축 행사를 갖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는데 이때 지금까지 자기를 보살펴 준 김 시몬ㆍ김 수산나 부부를 만나게 됐다.
1985년 12월 애국교회의 한 수녀가 당국에서 임 신부를 잡으려 한다는 정보를 제공해와 임 신부는 하얼빈을 떠나게 된다.
1986년 부활주일에 자신을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 신부는 성지주일 밤에「서란」에 있는 김 시몬ㆍ김 수산나 부부를 찾게 되었다.
김 시몬씨 집에서 첫 밤을 보낸 임 신부는『나는 갈 데가 없다. 사목도 못하니 조선으로 나가야겠다』고 한탄했다.
김 시몬ㆍ김 수산나 부부는 나중에 닥칠 피해가 무서웠지만 임 신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임 신부를 아이들「큰아버지」로 위장해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세들은 사람을 내보내고 방을 따로 마련한 김씨 부부는 이때부터 목숨을 건 생활을 감행했다.『신부님이 잡혀갈까봐, 그리고 자식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두려웠다』고 김 수산나씨는 말했다.
「서란」에 있는 김 시몬씨의 집은 시내와 농촌의 경계지점에 위치해 지리적으로 숨어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공안국에서 호구조사를 할 때 시내를 수색하면 농촌으로, 농촌을 수색하면 시내로의 피신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웃 사람이 임 신부를 보고 누구냐고 물어와 아이들 큰아버지다고 말했더니 왜 혼자 사느냐고 다시 물어왔다. 임 신부는『본 여자가 생각나 다른 여자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래서 혼자 산다』고 둘러대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1986년 성지주일부터 임 신부를 모셔온 김 시몬ㆍ김 수산나 부부는 3년동안 신자 외는 아무도 모르게 임 신부를 모시고 지냈다. 3년후부터는 차차 알려졌으나 당국에서는 구태여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임 신부를 모신지 1년쯤 후에는 신자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조선족 신자들의 방문이 잦아졌다. 대축일이면 60~70명의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술, 과일, 쌀 등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기도 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임 신부는『너무 많이 온다. 눈치 있게 오라』며 나무랬고 이후에는 2~3명씩 임 신부를 찾았다.
1991년 5월, 임 신부는 노환 끝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 해 7월부터 임 신부는 성무를 중단하고 요양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전주교구에서 임복만 신부의 생존을 확인하고 모셔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47년 중국에 공산당이 출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됨으로써 임 신부와의 연락은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을 맞아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족 신자들이 방문해 임 신부의 소식을 전주교구에 보내왔다. 이때부터 인편과 친척들을 통해 소식이 오갔다.
1985년 6월25일 임 신부의 사제서품 금경축 때 김수환 추기경이 귀국할 것을 편지로 건의했으나 임 신부는 중국 대륙의 한인 신자들을 버리지 못하겠다며 청을 거절했다.
1985년 7월14일 당시 전주교구장 박정일 주교도 귀국을 권유했으나 임 신부는 양떼를 두고 떠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임 신부의 귀국 권유는 계속되었으나 임 신부는 계속 거절하며 제의와 미사책을 요구해와 전주교구에서는 이를 보내주기도 했다.
1991년 여름 임 신부의 발병 소식이 성베네딕도회 김상진 신부를 통해 알려졌고 이어 임 신부를 모시고 있는 김 시몬씨의 자녀들이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있다.
1992년 2월 전주교구 총대리 유장훈 신부, 성소국장 양경배 신부, 삼례본당 김병엽 신부가 중국 길림성 서란에 가서 임 신부를 만났다. 이때야 비로소 임 신부는『이제는 병으로 신자들을 돌볼 수 없고 오히려 신자들에게 폐만 끼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귀국 의향을 보였다.
이에 전주교구는 임 신부 귀환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 신부는 중국 당국이 금지하고 있는 지하교회 신부이며, 탈옥수에다 호구(호적)가 없는 행불자여서 여권을 발급받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때로는 임 신부의 귀국이 불가능함을 느낄 정도로 귀국 수속이 어려웠으나 중국 당국과 많는 이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1992년 12월23일 임 신부의 출국 준비가 완료됨을 확인한 전주교구는 관리국장 이태주 신부와 교육국장 박인호 신부를 중국으로 파견했으며 미리 하얼빈에 나와 있던 임 신부를 모시고 12월 29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동안 임 신부가 귀환을 거절한 깊은 뜻을 읽을 수 있는 편지 한 통을 소개한다.
다음은 1985년 5월 임 신부가 전주교구에 보낸 편지 중 한토막이다.
『공경하올 주교님 안녕하십니까? 이 소인에게 강복하소서. 저는 제 조카 임상순을 통해서 주교님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듣는바에 의하면 주교님께서 저의 귀국 문제에 대하여 많이 관심하신다 하오니 경건한 마음으로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귀국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주교님 저 역시 한 작은 목동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넓은 천지에 많은 양들이 목자없이 사면팔방에 흩어져 굶주리며 목자를 찾는 애원의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착한 목자라면 어찌 이 불쌍한 양들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안녕을 찾겠습니까? 저는 이 양들을 찾고 또 찾아 때를 따리 먹이고 때를 따라 마시우고 때를 따라 한우리 안에 평안히 쉬게 하려 합니다.
이것이 즉 하느님이 저에게 주신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내 양떼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하고 고락을 갈이하려 합니다. 오직 주교님께 한 가지 간구하는 것은 주교님의 열렬한 기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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