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재중용이란 말이 있지만 사제생활을 하면서 이 말이 참으로 명언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신부님도 술 몇잔정도는 하면서 신자들의 기쁨도 고충도 들으며 거리감없이 사는것이 진짜 사목이라고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우리 신부님은 술을 안 하셔서 참 좋다는 말을 면전에서 몇번씩 말을 하여 술을 못 먹도록 압력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오금동본당은 신천동본당에서 공소로 운영되다가 본당으로 승격된 2년반의 짧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더구나 공소로 운영될 때, 70평의 작은 지하실에서 주일미사 1대만 했기때문에 구역내의 모든 신자가 주위에 있는 5개 성당에 흩어져 있었다. 숫자로 표시하면서 현재 우리 오금동성당에 미사 참례자 수가 3천5백인데 그당시 3백정도였으니 흩어져 있던 정도가 얼마나 실했는지를 생각 할 수 있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땅도 변변치 못하고 성당도 없는 조건에서 신자들을 본당으로 결집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모여 온다해도 자신들 몸에 배어있던 그 본당의 분위기가 아니니까 이렇게 하는게 좋겠다 저렇게 하는게 좋겠다는 충고도 잊지 않고 해주기도 했다. 나로서는 고마운 경우도 있었지만 힘이 들기도 했다.
또 이런 과정에서 남자신자들 모임에서는 술이나 가벼운 오락이 필요하였고 여자신자들 모임에서도 처음에는 친목이 중심이 되어 서로를 알게 하여 주는 기간이 필요하였다.
자연히 본당신부인 나도 술좌석이나 오락을 함께 하여야 하는데 과연 어느정도의 처신을 해야 하느냐 하는 어려운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렇다. 딱딱한 법으로 신부가 무장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범위에 사랑인데 사랑이 모든 것 위에 우선해야 하는가?
은퇴 신부님이 들려 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서품후 얼마 안되었을 때였으니 1950년대 초반인듯하다.
그당시는 노선 버스도 많지 않았던게 시골의 사정이 없고 통금시간이 있었던 때였다. 그 신부님은 어느 시골에 계셨다. 하루는 공소에서 늦게 오토바이로 본당으로 돌아오고 계셨는데 한 젊은 여자가 밤이 늦었으니 ○○까지 오토바이로 태워 달라는 것이었단다. 그 시간은 이미 버스도 끊겨 이웃마을만 가려 해도 자정을 넘길 형편이었단다. 그런데 그 신부님에게 그때 얼핏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여자를 태워 주었다가 누가 이 밤에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신부님은 그렇게 애절하게(?) 태워 달라는 여자를 못 본체하고 그대로 본당에 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신부님은 곧 그때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 참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과연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인가를 반문하게 되었고 자신의 일생에 한 오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처지에서 완벽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줄 알지만 특히 신부들에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냐 하는 것을 지혜롭게 선택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