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을 때 병원에 갈 일이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며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어떤 조그만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들어왔다.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인형과 같은 귀여운 꼬마였다. 그 꼬마도 책 한권을 집어들고는 앉을 자리를 찾고있었다. 나는 옆 자리를 양보해주고 앉으라고 한 뒤 말을 걸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냐는 물음에 감기란다.『어디에 사느냐? 몇 살이냐?』는 물음에 『여섯 살』이라고 대답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에게 『쉬! 떠들지 마세요. 앞 사람이 책을 읽고 있잖아요』하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는 것이었다. 내가 결코 큰 소리로 말한게 아니라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던게 틀림없다. 나의 영어가 유창하진 않지만 쉬운 말이니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을리도 없다. 그런데 그 꼬마는 내가 건넨 말이 앞 사람의 독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명랑하고도 당돌한 꼬마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꼬마의 질책하는 말에 말문이 막혀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니까 이번에는 그 꼬마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몇 살이냐?』 (영어에는 존칭어가 따로 없다.) 아니! 어른이 애들에게 나이를 물었기로서니, 어른이 아이에게 말 좀 걸었기로서니, 조그만 어린애가 어른에게 무안을 줄 뿐만 아니라 어른의 나이까지 묻다니! 도대체 한국사람의 사고방식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한번은, 커다란 백화점에서 일이났던 일이다.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말했다. 엄마는『너 집에 그런 장난감 있잖아』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애는 두말 않고 뒤편 구석으로 걸어갔다. 나는 궁금해서 물건을 고르는 척 하면서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 애는 구석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엄마 앞에서 큰 소리로 울면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에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그것도 소리를 죽이면서 울고 있었다.
나는 이 꼬마에게서도 역시 민족적인 망신을 당한 느낌이었다. 일종의 민족적 열등의식 비슷한 것을 느낀 것이다. 우리 한국 애들은 남이야 시끄럽건 말건 제 좋을 대로 떠들고 울고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목적을 관철시키려 생떼를 쓰는 것을 여러 번 보았는데, 미국 애들은 그 어린 나이에 벌써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을 배웠구나!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삶을 벌써 살고 있구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 한국 애들에게도 남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남을 해치지 않는 법부터 가르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옛날에 애들이었던 지금의 어른들이 이토록 이기주의에 젖어 있지 않았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