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양들이 얼마나 됩니까?』『많습니다』『목자가 자기 양들을 버리고 갈 때 그 양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주교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나는 머리를 숙이고 내 양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구랍 29일 50여년 만에 고향땅으로 귀환한 임복만(任福万) 신부가 고난과 박해의 시간 속에서도 중국사목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기 손에 맡겨진 양들 때문이었다.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세계정세 속에서 역시 변화라는 물줄기와 절묘한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대륙, 중국에서 귀환한 임 신부는 엄청난 굴곡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한 많은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다. 10억 중국인민이 함께 겪어야 했던 질곡의 삶이었지만 임 신부의 몫은 남달랐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사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대륙에서 자기의 양들과 더불어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한국인 사제였다. 32살, 고국을 떠난 한 청년 사제는 이제 80순을 넘긴 고령의 몸으로 고국땅을 밟았다. 육신은 비록 병들었지만 사제로서 걸어온 그의 발자취는 거대한 중국대륙 곳곳에 언제까지나 서려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남긴 발자취를 2회로 나눠 살펴본다.
1910년 1월10일생으로 알려진 임복만(任福萬) 신부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리 구교우 집안의 3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24년 14세때 부모곁을 떠나 대구 성 유스띠노 신학교에 입학한 임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남다름을 보였다. 동기생인 부산교구 은퇴사제 정재식(84세)신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임복만 신부는 공부도 잘하고 착한 신학생이었다. 사제서품 때까지 우리반의 반장을 지냈다.』
1935년 6월25일 사제품을 받은 임 신부는 나바위본당 보좌신부로 목자의 삶을 시작, 군산 둔율동본당 주임과 지금의 고산본당 전신인 되재본당 주임으로 재임했다.
일제치하에서 수탈을 당하던 시절이라 많은 애국지사들과 국민들은 중국으로, 만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 당시 전주교구 감목대리 김양홍(스테파노)신부는 만주지방의 조선인 신자들의 사목을 위해 1942년 4월 임 신부를 만주로 파견하였다.
만주국 신경, 지금의 길림성「장춘」성당에 도착한 임 신부는 4~5개월간 중국말을 배우고 첫 부임지인 흑룡강성 해북진의 선목촌성당으로 갔다. 그곳은 신자가 많아서 우리 동포 즉 조선족 신자만 1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1945년 8월초 당시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패망이 가까워지자 요시찰 인물인 신부를 처단하기 위해 경찰을 동원, 프랑스 신부 2명과 임 신부를 체포했다. 그러나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패망함에 따라 신부들은 곧 감옥에서 풀려났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무정부상태가 한동안 계속된 만주지역은 강도와 도둑들이 들끓었고 이들은 임 신부의 본당 관내에도 나타나 여러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입히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당시 임 신부도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한순간에 「알거지」가 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삶의 터전을 버리고 먼 지방으로 피신하기 시작했으며 조선인들은 소련군대의 도움을 받아 열차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만주지역의 어수선함과 조국의 광복을 맞아 임 신부는 조국으로의 귀국 의사를 갖고 당시 만주국 「장춘」교구장인 고 주교를 찾아갔다.
그때 고 주교와 임 신부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고 주교 : 『남아있는 양들이 얼마나 됩니까?』
임 신부 : 『많습니다』
고 주교 : 『그렇다면 목자가 자기 양들을 버리고 갈 때 그 양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임 신부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주교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나는 머리를 숙이고 내 양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다시 발길을 돌려 「해북」을 찾아갔다』
이후 45년 동안 임 신부는 모진 박해 속에 고통 받는 목자의 삶을 살게 된다.
1946년부터 공산당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부터 토지개혁이 단행되어 「해북」에서는 「조선인들이」신부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닦달하였다. 다행이 임 신부는 중국인 신자들의 거센 항변으로 심한 상처가 날 정도로 맞지는 않았다. 그 후 당국은 걸핏하면 임 신부를 감옥에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다.
당시 「해북진」에서 사목하던 임 신부는 혁명에 맞서 투쟁하다가 1949년 「하얼빈」으로 쫓겨가 그곳에서 사목을 했다.
1951년 시작된 종교혁신운동(3자혁신운동)은 가톨릭교회에게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를 거절하자 동료 조선족 사제였던 김선영 신부는 1951년 체포되어 1970년 옥사했다.
임 신부는 숨어서 활동하다가 1954년 체포되어 「반혁명분자」라는 글씨가 박힌 모자를 쓰고 5년 징역을 살았다. 형기가 거의 끝날 무렵 관청에서는 로마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했다. 이를 거부한 임 신부는 3년형이 더 가산돼 모두 8년을 감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62년 9월 석방되어 「빈천」이라는 곳에서 지내게 된 임 신부는 당시의 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 기간은 육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유쾌하고 성스럽게 지냈다.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나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그분이 젊어지신 십자가가 내 마음에 무한한 위안을 주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옥살이를 마친 사람들 중 보호할 가족이 없으면 다시 강제노동에 끌려가게 되어있었다. 8년간의 감옥생활에서 풀려났을 때 임 신부를 반겨줄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집단농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임 신부는 1년 후인 1963년, 농장을 탈출, 한 신자의 집에 은신하게 됐다.
이때부터 임 신부는 숨어서 활동하는 이른바 지하교회의 사목을 해나가게 된다.
중국 문화대혁명 후반기인 1968년 임 신부는 중국사람에게 논 한섬지기를 얻어 열심히 곡식을 가꾸고 있었다. 벼가 한참 자랄 무렵인 6월8일 임 신부는 또 다시 체포돼 「향방」이라는 곳에서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임 신부의 고통을 동북선족 교우 대표 김 요안나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임 신부님은 시내를 끌려다니며 매를 맞고 유치장에서 온갖 고문과 고통을 당했지요.』
중국대륙 전역을 초토화시킨 문화대혁명 기간중 가톨릭교회를 포함, 중국의 종교는 다시 한 번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임 신부는 1년1개월 만인 1969년 7월1일 중국 공산당 창립일에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생활비를 벌기위해 노동자로 나섰는데 하루 12시간씩 돌 깎는 일, 농사품을 파는 일 등을 하며 그의 본업(?)인 사목활동도 함께 해나가는 모험을 또 다시 감행했다.
1980년 등소평의 등장과 함께 중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주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천주교만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때문에 예외가 되어 많은 제한이 뒤따르고 박해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임 신부는 흑룡강성, 각현, 목단강, 하오깡, 이춘, 금마 등을 돌아다니며 사목을 해왔다.
1981년 경부터 임 신부를 잠시 모셨던 노광덕(바오로)씨는 당시 임 신부는 눈강성 산하 농장에서 일하다가 나왔는데 가진 재산이라고는 감옥에서 사용하던 「누더기」와 「성경책」뿐이었다고 증언했다.
눈강성에서 임 신부의 감옥생활을 노 바오로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눈강 감옥에는 음식이 태부족했다. 임 신부님은 굶주리는 수인들을 불쌍히 여겨 자기 음식을 나누어 주고, 또 어떤 이들은 이를 뺏어 먹기도 했다. 당연히 임 신부님은 몇 끼니를 굶게 되고 곧 기진하여 쓰러졌다. 이를 본 죄수들은 자기들의 욕심을 뉘우치고 임 신부를 존경하게 됐다. 임 신부는 기력을 회복한 후 죄수들을 상대로 전교하며 세례를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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