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괜찮았으면 하느님께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금년으로 「사제서품 금경축」인 50주년을 맞이하는 서울대교구 박성춘 신부(78세ㆍ레오)는 건강으로 인해 비교적 일선에서 빨리 물러난 것을 이같이 안타깝게 표현하면서도 『파견된 소임지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많은 연세 속에서도 절제된 표현과 몸가짐으로 대화에 응하는 박신부는 본인의 표현대로 조용한 성품 속에서도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해온 사제로 알려져 있다.
국민학교를 졸업후 곧바로 사제가 되는 길에 들어선 박신부는 용산 성심대신학교 출신의 마지막 사제로서 구약학강의로 널리 알려졌던 고(故) 선종완 신부와 함께 42년 2월 사제로 서품. 한평생 목자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서울 명동성당 보좌로 출발한 박신부의 사제생활은 번잡함을 꺼려했던 성품과는 달리 그야말로 다양했고. 그당시 상황으로 볼 때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에서 사목 활동을 한 성직자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44년 충남 장항본당의 초대본당신부로 재임하던 박신부가 활발한 지역활동의 보복으로 사제로서는 처음 노동징용으로 차출. 일본으로 이송돼갔다가 도중에 탈출한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박신부는 인터뷰를 통해 『일제말기 당시 노동자 징용으로 차출돼 나간 바 있다』고 밝혀 일제치하에서 사제도 징용으로 나갔던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내 주었는데 지금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일제치하에서 신학생이 징용으로 끌려나갔던 기록은 있으나 사제가 징용에 나갔던 기록은 없었다.
박신부는 『44년 5월 충남서천군 장항읍에 소재한 장항본당의 초대주임신부로 활동하던중 활발한 활동에 반감을 가진 관할 경찰서에서 자신을 노동자로 징용.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고 털어놨다.
또 박신부는 『일본에서 징용자들을 현장으로 인솔하는 도중에 탈출. 그지역 교구장께 인사하고. 부산으로 몰래 들어왔다』면서 『일본을 떠난 바로 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국내에 들어와 교구장으로부터 신학교 교사로 신학교에서 숨어 있으라는 지시에 해방직전까지 신학교에있었다』는 박신부는 『일제치하 당시 불과 3개월여 기간이 었지만 분명 징용에 끌려갔었고. 당시 신문에 「성직자도 징용」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나온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제로서 이같이 특이한 경험을 겪은 박신부는 이후 마산 성지여중을 설립한 것을 비롯 초창기 군종신부, 가톨릭 청년사편집인 및 사장, 가톨릭대학교수 안성안법중고교교장, 병원 원목사제, 가톨릭의대교수, 장항, 마산, 이천등지에서의 초대본당주임 등 전국을 무대로 다양하고도 각 분야의 개척자적 입장에서 생활을 해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사제들에게는 주교님의 지시는 곧 하느님의 명령과 동일시됐고. 이에 순명하는 것이 사제로서의 근본적인 자세였다』는 박신부는 『여러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교님께서 여러 곳에 파견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겸손되게 밝힌다.
『항상 파견된 사목지를 그전보다 더욱 발전시킨다는 자세로 성직생활을 해왔다』고 고백하는 박신부는 『지금도 예전에 있었던 임지들이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 그렇게 기쁠수가 없다』고 들려준다.
교육을 위해 자신이 직접 필요한 자료를 번역. 당시에는 문명의 이기인 등사기로 프린트를 할 정도로 사목에 있어 현대적 감각도 갖추었던 박신부는 『유학도 가려 했었고…. 사실 사제로서 많은 욕심도 있었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지금에 와서도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되는 것은 순명』이라고 강조한다.
한국교회와 관련, 박신부는 『한국교회는 과거에 비해 크게 발전했다』고 크게 기뻐하면서도 『발전에 비해 교회를 위하는 호교론적 입장의 성직자와 신자, 서적은 감소된 듯 하다』고 피력, 아쉬움을 나타냈다.
주교님은 물론 성직자와 신자들도 사업과 같은 경제적 측면보다는 본당공동체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고, 가능한 전례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는 박신부는 완숙기에 접어든 한국교회가 교회의 근본교리적 입장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현재 박신부는 서울 압구정2동 한양아파트 2동 507호에서 은퇴사제로 생활하고 있다.
한편 서울대교구는 4월 16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성유축성미사시 박신부의 금경축 축하미사를 함께 봉헌하며. 미사후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축하연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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