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황제에 의해 3명의 교황이 동시에 폐위되고 새 교황이 선출된 큰 사건(1046)에 이어 1054년, 중세 초기교회사에 막을 내리게 하는 또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동서교회의 결정적 분열, 즉 동방 이교(離敎)의 출현이었다. 전자가 중세 전성기에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교황권이 상승하는 전환점이라면 후자는 동방교회들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이제 가톨릭교회사의 무대가 서구만으로 국한되고 축소되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동서 교회의 결정적 분열은 700년이란 오랜 세기에 결과이다. 이 대립은 수도의 천도(330)와 제국의 동서 분할로 시작되어, 제2의 로마를 자처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의 경쟁심, 프랑크 제국에 대한 교황의 지지, 교리논쟁에서의 대립, 서로의 문화와 전례에서의 여러가지 차이로 인해 계속 악화되었다. 이리하여 9세기에 잠시 분열이 있은 후 마침내 11세기에 결정적인 분열로 이어졌다. 이에 앞서 8세기에 시작됨 성화상 논쟁은 결국 교리논쟁의 하나였으나 그 직후 분열이 일어났음으로 여기서 같이 다루고자 한다.
■ 성화상(聖畵像)논쟁 (726~842)
성화상 논쟁이란 그것을 공경해야 한다는 정통 신앙파와 그것을 반대하는 성상 파괴주의자들 사이에 있었던 대립과 투쟁을 말한다.
성화상 공경이 비록 교회에서 허용되어 왔을지라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그들은 신(神)은 물론 그리스도까지도 인간이지만 동시에 신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화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위험시 했을 뿐더러 우상숭배로 여겼다.
그러므로 비잔틴 황제 레오 3세가 726년 성화상 금지령을 선포하고 성화상의 파괴를 지시했을때 그에게도 위에서 말한 종교적인 이유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였다.
즉 원래 성화상을 반대하는 유대인 특히 회교 아랍인들에게 영합하려한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의 금지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제르마노가 파면되었다. 교황들이 그를 반대하고 단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무시당했다. 박해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때 더욱 가혹해졌다. 특히 그는 수도자들을 박해하고 유배 보냈다.
그중에는 순교자도 있었다. 유명한 희랍교회학자 요한 다마세노도 저술을 통해 성화상 공경을 변화한 탓으로 여러번 파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던중 이레네 황후가 아들의 성정으로 실권을 장학하게 되자 양보하게되었다. 이레네는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 협상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87년 니체아로 공의회(7차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피조물에 대한 공경을 구별하고 또 공경 자체도 화상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실체(實體)라는 교리가 정의됨으로써 성화상 공경이 다시 허용되었다. 그후의 황제들이 금지령을 갱신하고 또다시 백해를 가했으나 842년 테오도라 여황제가 즉위하자 이 논쟁이 완전히 종식되고 또 그것을 기념하는 축일까지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성화상 논쟁은 110년만에 끝났다.
이 논쟁은 프랑크 왕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알 대제는 비잔틴과의 경쟁심에서 소위「카알문서」(790)와 독일 국가교회회의를 통해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고 나섰다. 희랍어에서는 흠숭과 공경이 구별이 되지만 라틴어에는 그런 구별이 없다. 따라서 반대는 희랍어에 대한 무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카알의 반대로 동서의 대립이 더 악화되었다.
■ 동방 이교의 탄생
동서교회는 9세기 포시우스로 인해 한때 분열되었다(포시우스이교). 그는 858년 평신도로서 일약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등용되었다. 비록 오만하고 야심적이긴 했으나 학식이 풍부한 큰 인물이었다. 그런데 교황 니콜라오 1세는 그를 총대주교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863). 그래서 불가리아 선교 문제를 놓고 교황과 포시우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때 포시우스는 사제의 독신제, 니체아 신경에 삽입한 「필리오 퀘」(Fili-ioque) 등을 들어 서방교회를 신앙의 배신자로 맹렬히 비난하고 또 교황을 이단자라고 하며 그의 폐위를 선언했다(867).
바실리우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869년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8차ㆍ동방에서의 마지막 공의회)를 소집했고 여기서 포시우스가 정식으로 단죄되었다. 그후 포시우스는 다시 복직되고 또 교황과 충돌했으나 곧 다시 파문되고 유배되었다. 이렇게 일치가 회복되었으나 그것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1043년 미카엘 체룰라리우스가 총대주교가 되자 또다시 분열, 결국 그것이 결정적인 분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 분열의 계기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간 교황들은 남부 이태리에서 노르만족과 사라센에 대항하고자 비잔틴과 제휴를 시도했었는데 그것이 레오 9세 교황 때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체룰라리우스는 그렇게 될 경우 비잔틴의 영토인 남부 이태리에까지 교황의 권한이 확대될 것을 겁내고 그 접근을 막고자 라틴교회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 전례의 성당과 수도원들을 강제로 폐쇄시켰다. 뿐더러 그는 미사에서의 누룩 없는 빵의 사용, 사순절의 알렐루야의 폐지, 사제의 독신제,「필리오 퀘」등 서방 라틴교회의 전례와 관습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 교황은 황제와 협상을 추진하고자 1054년 훔베르트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다.
협상은 처음부터 불운했다. 야심적이고 오만한 체룰라리리우스는 사절들을 만나기를 거부하고 모든 담판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
한편 홈베르르 추기경도 성급하게 행동함으로써 신중한 중재자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는 7월 16일 소피아 성당 중앙 제대 위에 미리 작성한 파문 칙서를 놓고는 떠나버렸다. 이어 총대주교도 사절들을 파문하고 교황의 파문칙서를 불살라 버렸다. 이것이 영원한 분열이 될줄이야 누가 짐작했을까?
1065년 양 교회는 서로의 파문 선언을 폐지함을 장엄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이로써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지 일치가 회복된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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