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 교동도는 꽤 넓은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다. 원래 서너 개의 섬으로 쪼개져 있었지만 고려시대에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많은 인구 중 일부가 교동도에 이주하면서 방파제를 만들어 하나의 섬이 됐다. 이후 고려는 교동도를 국방의 요새로 관리하게 된 것이다. 교동도는 47.143㎢ 면적의 3/4이 논으로 형성돼 있다. 바다였던 곳이 갯벌이 되고 오랫동안 묵혀 있던 땅은 6·25 전쟁 때에 연백평야에서 대대로 농사를 일구던 인구가 유입되면서 식량을 얻기 위해 넓은 농경지로 일궈냈다.
교동도의 평야는 동절기가 되면서 철새들로 장관을 이룬다. 쌀을 수확하고 난 빈들에는 이른 아침부터 철새들이 먹이를 구하느라 한강하구 건너 연백평야로 날아갔다가 저녁이면 다시 교동평야로 날아든다. 날씨가 좋을 때면 연백평야와 연백염전이 눈앞에 잡힐 듯이 펼쳐져 있지만, 강 건너 고향을 바라보면서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마음은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는 철새들의 무리를 볼 때마다 부러움을 느낀다.
실향민 할머니 한 분이 읊은 시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격강천리라더니 바라보고도 못 가는 고향일세, 한강은 임진강과 예성강을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가련만 인간이 최고라더니 새만도 못하구나….’
남한에 정착한 어느 탈북민 단체가 교동도에 통일안보견학을 왔다. 교동도는 북한의 민간인 마을을 가장 가깝게 관측할 수 있는 곳이라 많은 실향민 가족들이 찾는다. 지석리에 있는 망향대는 연백군에서 피난 왔던 실향민들이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고 건너편 마을에 있는 부모나 조상들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탈북민 중 한 분이 황해도 연백군(현재 연안군) 출신이라 10여 년 전 탈북을 앞두고 강 건너에서 이곳 교동도를 보며 환하게 켜져 있는 불빛을 보며 남한사회를 동경하게 됐다고 한다. 그분은 “이곳에 와서 내가 살던 곳을 건너다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어서 통일이 돼서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왕래하며 살면 좋겠다”고 한다.
교동대교는 많은 수도권 인구와 학생들이 교동도를 찾는데 접근성을 가져다주었다.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교동도가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을 마주하고 있지만 중립수역에 둘러싸여 공격용 무기가 없는 섬이라는 새로운 발견에 놀라워한다. DMZ(비무장지대)와 NLL(북방한계선)과 구별되는 평화의 섬 교동도는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나 이질감보다 민족의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는 환경과 문화가 풍부하다.
교동도는 전쟁1세대의 민족상잔의 아픔을 치유하고, 2세대들의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해 가는 전환점을 맞고 있다. 이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차세대 통일지도자들이 교동도에서 소통과 나눔 그리고 새로운 통일문화를 창출해 가기 위해 오늘도 바삐 움직이고 있다.
김영애(데레사) (사)새우리누리 평화운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