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일이다. 알고 지내던 네 쌍의 ME 부부들과 함께 수도원의 작은 경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서로 눈을 쳐다보며 진심을 담아 “당신은 나의 감실입니다”라고 인사하자고 권해 보았다.
쭈뼛거리고 어색한 웃음을 참으면서긴 했지만, 세 부부는 대체로 잘 했다. 그런데 한 쌍은 그렇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으려 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길어지자, 남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의 감… 옥이오!”
순간 모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웃음이 경당에 잠깐 고였던 무거운 긴장의 기운을 모두 흩어버렸다. 감실과 감옥은 서로 글자 하나 차이밖에 안 되는구나…. 새삼스런 깨달음 끝에 좋아하던 시구 하나가 마음을 스치며 지나갔다.
가슴 깊이 / 별을 지닌 사람들은 / 모두 감옥에 갇힌다
별 향한 창틀 하나 달린 / 감옥 속에
한번 / 푸른 하늘을 본 사람들은 / 모두 감옥에 갇힌다
하늘 향한 창틀 하나 달린 / 감옥 속에 (김영석)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다가 여러 차례 실제로 감옥에 갇힌 사람이다. 그러나 굳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도 그는 어차피 ‘수인(囚人)’이었다. 스스로를 늘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필리 3,12 : 「200주년 성서」) 사람이라 여겼던 터이므로.
지극한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아본 사람은 금세 알리라. 그 사랑이 그를 ‘감염’시키고 사로잡아 버린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결국 그의 ‘감옥’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그 사랑의 흐름을 타고 함께 사랑하면서 그 역시 상처입게 되고 약자가 된다.
십자가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상처입으면서 먼저 그를 사랑한 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는 시인의 노래에 얼마든지 이렇게 추임새를 넣을 수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조만간 감옥에 갇힌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삼위일체라는 ‘별’과 ‘푸른 하늘’의 영역을 떠나, 초라하고 옹색하고 땀내와 비린내 진동하는 지상에 내려와 갇히셨다.(필리 2,6-11 참조) 십자가는 그분의 마지막 감옥이었으리라. 그러나 부활하셔서 다시 푸른 하늘과 별의 세계로 돌아가셨어도, 그분은 종래 그곳에만 머물지 못하셨던 게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를 위해 지상에서 다시 조그만 감옥에 갇히시니, 그것이 바로 감실이 아닐까. 우리가 조배하는 성체가 모셔진 감실은 그분의 ‘감옥’이 아닐까.
그러나 그분은 성당 감실에만 갇혀 계시지 않는다. 그분의 ‘실체적 현존’은 세상의 고통이 있는 모든 곳에 있다. 딱 하나만 예를 들자면, 그분의 ‘감옥’은 세월호 사건 이후 지금까지 고통받는 숱한 부모들 속에, 먼저 떠난 자식을 묻은 말 못할 가슴 속에 있다.
세상의 숱한 ‘변방’에서 하루하루 불안하고 고단한 생존을 이어가는 이들이야말로 그분의 살아있는 몸이요 그 현존이며 그래서 그분의 ‘감옥’이다. 사실 성경과 초세기 교부들의 한결같은 확신에 따르면 ‘성체’, 곧 그리스도의 몸은 무엇보다 바로 고통받는 “작은 이”들의 몸이다.(마태 25,31-45 참조) 그러므로 우리의 성체조배는 그리스도의 이런 ‘감옥-감실’들에까지 그 조배(朝拜)의 영역이 확장되어야 마땅하리라.
성체조배를 많이 하는 예수 성심 성월에 해 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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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