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리구 남양본당(주임 김보람 신부)은 남양반도의 첫 본당으로서, 신유박해 때부터 신앙의 역사를 이어온 공동체다.
남양반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전후였다. 남양 지역은 예로부터 포구가 발달하고 해상과 내륙의 교통이 발달한 곳이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전래될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상세히 기술한 「사학징의」에는 신유박해 당시 체포된 신자 제관득이 남양 고을 구포의 조카집에 숨어 있다가 관가에 체포됐다고 기록돼 있다. 남양 백학 지역 등에 교우촌이 성립된 것이 이 무렵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김 필립보, 박 마리아 부부를 비롯한 다수의 신자들이 남양도호부에서 순교했다. 8년 여에 걸쳐 계속된 병인박해의 여파는 남양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왔다. 남양고을 곳곳의 교우촌들은 한동안 폐허 상태로 방치됐다.
남양에 다시 신앙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1876년 이후 선교사들이 국내로 잠입하면서다. 선교사들은 흩어진 교우를 다시 모아 성사를 집전했고, 이를 통해 박해로 스러져가던 교우촌과 공소가 재건됐다.
1880년대 초반부터는 남양의 홀연이, 백학, 자동 등의 교우촌들이 선교사의 기록 속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 1909년에는 남양 읍내에도 공소가 설립됐다.
남양지역 본당 설립은 1950년대부터 신자들을 중심으로 준비돼 왔다. 공소 신자들은 기성회를 조직하고 성금을 모아 한옥기와집을 성당으로 꾸몄다. 또 본당 설립을 추진해 마침내 1961년 초대 주임인 양병묵 신부가 부임했다.
본당이 설립되자 남양의 신자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본당 설립 당시 65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가 5년여 만에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한옥기와집이 늘어난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본당은 새 성당 마련에 들어갔다.
본당은 6·25전쟁으로 궁핍해진 지역주민들을 위한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본당 설립 이전인 1950년대 후반부터 염전을 만들고, 개간사업을 펼쳐 논을 만들었다. 이런 개간사업에는 신자는 물론이고 생계가 어려웠던 피난민들, 영세민들이 적극 참여했다. 본당은 이들을 위해 해외에서 오는 구호물자를 직접 운반해 분배하기도 했다.
본당은 남양성모성지를 조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본당은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개발을 시작해 순교지로 추정되는 건넝골을 매입하고 십자가와 제대, 대형 돌묵주를 설치해 나갔다. 특히 묵주기도운동을 통해 성지가 성모성지로 봉헌될 수 있도록 힘썼다.
현재 본당은 신자 수 2600여 명으로 지역의 내·외적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활성화본당으로서 청소년사목도 활발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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