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등이’는 갓을 쓴 등불이라는 의미로 박해시대 교구에 살던 신자들이 ‘사제’를 부르던 은어였다. 오롯이 신앙을 지키며 사제를 기다리던 간절한 마음이 그 말에 담겼다. 교구에 사제가 사목하는 첫 본당이 갓등이라 불리던 교우촌이란 것은 참 신비한 인연이다. 교구의 첫 본당 평택대리구 왕림본당(주임 윤진석 신부)에는 박해시대부터 이어오는 교구의 역사가 담겨있다.
갓등이 교우촌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았는 지를 나타내는 명확한 자료는 없다. 대신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남긴 1839년 1월 25일의 일기에 ‘갓등이공소’라는 명칭이 나와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됐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 1888년 명동본당에서 분가할 당시 첫 왕림성당의 모습은 2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초가집이었고 1901년에 33칸 기와집으로 새로 지어졌다. 교구의 유일한 본당에 신자는 1790명이었다. 이 숫자가 지금의 85만 교구민을 이루는 씨앗이 됐다.
본당은 예로부터 선교를 위한 다리였다. 수원과 충청도를 잇는 좁은 산길에 있던 지리적 특성 덕분에 중국에서 배를 타고 오는 선교사제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머무르는 곳이 됐다. 신자들은 사제들을 철저히 보호했다.
본당설립 이후 가장 활발했던 사업은 바로 ‘선교’다. 특히 본당 평신도사도직단체 중 ‘선교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신심 깊은 회장으로 구성된 선교단은 농한기가 되면 다른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마치 바오로사도나 초대교회 사도들이 여러 지역을 찾아 복음을 선포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런 노력으로 미리내본당·하우현·북수동·발안·남양·정남본당 등을 분가시키며 교세를 확장시켜나갔다.
교육사업에도 노력을 쏟았다. 중세 유럽의 교회가 교육을 맡았던 것처럼 본당은 1893년 한문 서당인 삼덕(三德)학교를 설립해 지역의 문맹을 퇴치하고 선교를 해나갔다. 이후 삼덕학교는 신명의숙, 왕림학원, 왕림강습소, 봉담고등공민학교, 광성국민학교 등으로 변모하며 지역의 교육을 맡아왔다. 누에를 키운 수익으로 전교생의 수업료를 면제해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장을 열었던 학교는 안타깝게도 6·25전쟁으로 폐교하게 됐다.
산업화와 함께 도시로 이주가 늘어나면서 본당의 교적 상 신자 수는 설립 당시에도 못 미치는 1400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당의 선교와 신앙교육의 뜻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본당이 운영하던 학교터에는 수원가톨릭대학교가 세워지고, 인근에는 갓등이피정의집이 교구 청소년·청년들의 신앙교육의 장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또 한국 외방선교회 신학원, 천주 섭리 수녀회,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등 교회 기관이 2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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