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신인은 전 세계 가톨릭의 수장이자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다. 그 옛날에 만나주지도 않고 문전박대하던 교황들이 생각나면서 이게 꿈인가 싶을 만큼 감개가 무량하다. 성인은 교황에게 부여된 거창하고 화려한 갖가지 존칭들을 과감하게 포기하라는 말로 첫 번째 편지를 시작했다. 계속해서 그는 성직자와 평신도처럼 똑같은 하느님 백성의 신분을 가르며 교계제도를 수호하는 권위주의적 전통이나 관습을 버리라고 훈수하며 남모르게 묻어만 두었던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점점 가속이 붙었다. 일필휘지다.
책의 어느 부분을 보나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내용은 없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었음직한 지당하고 옳은 말씀들이다. 하지만 누구도 가슴에 담아두기만 했지 감히 발설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익명의 저자는 작금의 교회의 실상을 꿰뚫어보고 13세기에 살았던 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입을 빌려 전 세계교회의 형제자매들(특별히 성직자로 분류되는 윗사람들)에게 아프게 호소한다. 옆구리가 찔리고 속속들이 켕기지 않는 대목이 없다.
돌이켜 성찰하건대 우리는 여태껏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들에 큰 가치를 두고 살았던 반면 “하라!”는 것들은 마치 순명을 거스르는 배은망덕이나 분열을 조장하는 범죄로 여겨온 게 사실이다. 우리는 안다. 그분의 훈수를 받아들인 현 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어깨동무하고 미래를 활짝 열려면, 그리하여 교회개혁을 통한 진정한 예수의 공동체를 건설하려면 지금껏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 편안히 안주하도록 주어진 매혹적인 권력행사를 송두리째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제들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각오가 없는데 결단과 행동이 뒤따를 수 있나?
이왕에 교황 방한 1주년을 기념해서 교구장 주교들이 이 책을 소속 교구의 사제들에게 정독하고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면 침체된 한국교회에 새바람이 되지 않을까? 좀 더 나아가 각 신학교마다 강좌를 개설하고 젊은 사제지망생들의 필독서로 지정해서 지속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