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저서를 통해 ‘주권’(sovereignty) 개념으로 유명해진 이탈리아 철학자·미학자·비평가 조르조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가 국내 번역됐다. 발터 벤야민과 마르틴 하이데거로부터 영향을 받아 참신한 역사인식과 세계관을 제시해 국제적으로 뜨겁게 회자되고 있는 아감벤. 그는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재판’이라는 형식으로 이뤄진 빌라도와 예수의 만남을 파헤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의 초점은 예수가 아니라 빌라도에 맞춰졌다.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재판에서 빌라도의 역할을 출발점으로 삼아 서구사회에서 법적 판단이 담당해 온 기능을 다룬다. 아울러 영원한 것과 역사적인 것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방식에 대해 탐구한다.
책이 주목한 것 가운데 하나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한 질문이다. 세속 법정이 판단할 수 없는 역설적 사안을 다루고 있는 현장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라고 묻는다. 이 책은 구원의 대상인 피조물이 ‘영원’에 대해 판결해야 하는 역설의 의미에 천착한다.
주해와 보론을 포함해 21편의 글로 이뤄진 얇은 책이지만, 아감벤의 사유에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칼 슈미트, 니체, 키에르케고르 등의 사상과 성경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아감벤의 사유는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