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이태석 신부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톤즈에 두고 온 아이들 때문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던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태석 신부와 로마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동고동락하던 시절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사제품을 받고 나서 그리고 그는 신학생 신분으로 함께 수학했습니다. 강의가 없을 때면 종종 기숙사 제 방으로 놀러오곤 했습니다. 같이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어떤 때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유학생활의 고달픔을 달래던 시절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살아생전 이태석 신부는 전형적인 살레시오 회원이었습니다. 썰렁한 농담도 곧잘 하고 아이들과 토닥토닥 장난도 잘 쳤습니다. 틈만 나면 형제들과 어울려 운동하기를 좋아했고 형제들과 둘러앉아 삼겹살 구워먹는 것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물론 톤즈에서 선교사로서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삶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선교 영성에 따라 톤즈 아이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고자 다방면에 걸쳐 노력했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의 정신에 따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동료를 먼저 떠나보낸 수도자로서 정말이지 감내하기 힘든 고통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몇몇 영상물들을 통해 이태석 신부의 생애가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앞다투어 그의 정신을 기리는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사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실제 이태석 신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형태의 왜곡이나 과장, 훼손이 벌어졌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뿌리인 사제요 수도자,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신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켰습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존재로서의 이태석 신부가 아니라 영웅, 자연인으로서의 그를 추모하는 기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단체의 행보를 바라보면 교묘한 상술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그 누구보다도 이태석 신부를 아끼고 사랑하는 저희 동료 수도자들의 솔직한 심정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좀 조용히 놔뒀으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톨릭교회와 수도회 전통 안에서 한 수도자가 세상을 떠나면 우선 기도와 침묵 가운데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 조명합니다. 때로 고인이 행한 영웅적인 사목활동조차도 하느님께 더 많은 칭찬을 받도록 조용히 덮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갖게 되는 소망 한 가지는 빨리 이태석 신부에 대한 지나친 과열 현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태석 신부가 상업적 도구로 활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임 관구장 교육차 로마 살레시오회 본부에 갔을 때 여기저기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한 사무실 앞에 제 발길이 멈추었습니다. 그곳은 성인(聖人)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살레시오 회원들의 시복시성 작업을 담당하는 부서였습니다. 담당자는 매일같이 시복시성대상 형제들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입니다. ‘만일 이태석 신부와 관련된 각종 추모 사업이나 성역화 작업, 시복시성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면 그 일은 살레시오 회원들이 나서서 해야 합당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그런 작업을 하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지금은 또 다른 이태석 신부를 기억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일의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화약고 같은 이슬람 지역에서 순교할 각오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또 다른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깊은 죽(竹)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 신분조차 숨긴 채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익명의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본당 신자들의 영혼을 성심껏 돌보느라 매일 과로에 과로를 거듭하는 ‘우리 본당 주임 신부님들’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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