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살이를 제대로 살펴보면 허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허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그 원인을 좀 더 자세히 더듬어 봤으면 합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도대체 무슨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좀 언급을 해 두긴 했습니다만, 허무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도 한마디로 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의 분리라는 망상에 빠져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와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모든 고통과 죽음을 동반한 허무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근원, 즉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한편으론 자기 즉 에고를 주장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해 자기 나름의 살림을 차리고 싶은 마음도 강하게 일었지만, 동시에 한편으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떠났다는 의식이 극렬한 죄의식과 공포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사람은 이 죄책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힘들어지자 그 탓을 전부 외부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의 탓이고, 내 바깥의 자연의 탓이라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창세기 표현을 빌리면 아담은 하와의 탓이라고 하고 하와는 뱀 탓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면서 자기 바깥을 향해, 책임져야만 할 외부 대상들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은 이제부턴 자기 스스로 생명을 지키며 살아갈 방도를 강구해 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철저히 자신인 에고를 지키기 위한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비롯한 외부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의 공격적 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이런 험악한 불행의 사태를 초래한 외부 사람과 사물들에 대해 비난을 퍼부음과 동시에 공격의 칼날을 거두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분리니 죄책감과 두려움이니 분노니 공격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마음의 가장 깊은 속 부분 즉 무의식 내지 영의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란 것입니다. 이 말은 마음의 의식 차원에선 자각하기도 쉽지 않고 통제하긴 더더욱 어렵다는 것입니다. 깊은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 내지 힘들은 의식 차원으로 올라올 때는 사뭇 다른 모습을 띠게 됩니다.
마음을 의식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대단히 점잖고 예의 바르고 태연한 척합니다. 대개는 약간의 짜증이나 성가심 혹은 언성을 다소 높이는 일 정도로 그칩니다. 보통은 이처럼 각자 의식이 만들어낸 가면을 쓰고 정상이라는 평균치를 유지하며 위태로운 공동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에고인 자신을 건드린다 싶으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걸린다 싶으면, 예상치도 못한 강한 저항과 분노와 파괴력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이는 바로 무의식 차원과 연결된 강한 힘이 솟구쳐 올라온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보통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의 말이나 행동을 비판 내지 비난하면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고 감각 세계가 파악하는 외적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들이란, 실은 의식으로 통제되지 않는 무의식이란 깊은 마음에 뿌리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 존재의 참된 근원에서 떨어져 나온, 에고의 마음의 전체적 구조와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의 마음 내지 에고에 대해 어찌 불쌍한 마음이 일지 않겠습니까.
유시찬 신부는 1997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수원 말씀의 집 원장, 서강대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순천 예수회영성센터 피정지도 사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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