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받은 직후인 20년 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가곤 했다. 수도원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왜관읍 외곽에 위치해 조용했고 수도원이 정원처럼 잘 꾸며져 있어 좋았다. 수도원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스며든 빛이 신비스러웠다. 장엄하고 엄숙한 미사 분위기도 좋았다. ‘해빗’이란 모자가 달린 검은색 수도복을 입은 신부와 수사들이 줄지어 대성당에 들어서면 미사가 시작된다. 수십 명의 신부와 수사들은 일반인과 달리 제대 좌우에 놓인 기도석에 앉는다. 반주 없이 성가를 부르는 수사들의 목소리는 여느 합창단보다 아름다웠다. 그 목소리에 집중하다보면 미사는 끝이 나고 말았다.
수도원에 가는 이유는 또 있었다. 영성체를 할 때 포도주와 같이 모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는 신자들이 성체를 잔에 담긴 미사주에 직접 찍어 모신다. ‘이맛이야!’라고 할 정도로 달콤하고 입 안을 환하게 했다. 그 신비스런 향기는 미사가 끝날 때까지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당시 필자는 영성체를 할 때마다 이런 다짐을 하곤 했다. ‘다음에는 성체를 미사주에 푹 담가 더 많은 신비를 느끼고 말 것’이라고. 그러나 매번 실패했다. 제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렇게 다짐했던 것을 깜빡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돌아서서 성체를 모시는 순간 그 생각이 나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미사주는 특별한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의 신비 때문일까. 여하튼 왜관수도원 미사주 향은 필자가 먹어본 와인 중에서 최고였다. 다가오는 주일, 수사님도 뵐 겸 왜관수도원에서 미사를 드릴까 보다. 이번에는 두 눈 찔끔 감고 한 번 해봐야지. 또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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