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중반, 필자가 세례를 받은 직후 경기도 안성에 있는 미리내성모성심수녀원에 간 적이 있다. 십자가의 길 14처 중 예수님이 쓰러져 우리를 쳐다보는 장면이 있었는데, 눈동자는 살아 있는 듯 보였고 눈빛은 간절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똑바로 살아라’는 메시지였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몇 년 뒤 성지순례길에 그곳에 다시 들렀을 때도 필자에게 향하는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동안 필자는 달라진 게 없었다.
전남 구례에 있는 화엄사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4사자3층석탑이 바로 그곳이다. 필자는 화엄사에 가면 국보인 각황전엔 관심이 없고 곧장 석탑을 찾는다.
석탑은 각황전 옆으로 난 100여 개의 계단을 따라 3분쯤 오르면 나온다. 소나무로 빙 둘러쳐진 그곳엔 석탑과 석등이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석탑 안에는 아들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어머니상이 있고, 석탑 아래 석등 안에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께 찻잔을 올리는 아들이 있다. 모두 무거운 돌을 이고 있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와 어머니이다.
필자는 그곳에 가면 석탑을 떠받치고 있는 어머니상과 마주한다. 짧게는 수분, 길게는 수십여 분 동안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연기조사 어머니가 필자의 어머니로 바뀐다. 어머니는 인자하게 “잘 했어, 그렇게 사는 거야”라며 격려를 하기도 하지만 때론 “그렇게 살면 안 돼, 네가 제대로 살지 않으면 머리에 인 돌탑이 더 무거워진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이번 주말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지리산에 한번 다녀올까 보다. 이번에 가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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