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늦가을,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 피정을 갔다. 불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수도원은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고 신부·수사들과 함께 기도하고 미사 드리고, 원할 경우 노동도 하며 수도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새벽 4~5시쯤 아침기도가 시작된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수도원에서 얼마 안 떨어진 불암사 종소리에 잠이 깬다. 수도원의 새벽은 고요하고 아늑하다. 싸한 새벽 공기가 코를 타고 가슴까지 파고든다. 넓은 방 한 칸 크기의 성당 안은 옆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좁지만 분위기만은 여느 성당보다 경건하다. 나직한 노랫소리가 울려퍼진다.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신부와 수사들이 아침기도를 드리며 부르는 찬미가다. 이어 성경이 낭독되고 기도한다.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사들이 올리는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現存)을 느끼게 할 만큼 경건하고 엄숙하다. 낮에는 배밭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에겐 많은 것을 느끼게 한 피정이었다. 아내 역시 15년 전쯤 그곳에서 피정을 했다고 했다.
10월 초, 처가 가는 길에 수도원을 들리게 됐다. 이번엔 아내와 딸과 함께 갔다. 수도원 분위기나 그곳 성직·수도자들은 그대로였다. 피정 당시 필자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셨던 수사님은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아내와 친분 있는 수사님이 반가이 맞아주셨다. 수사님은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은 것도 그렇고 이곳에서 피정을 한 것도 그렇고, 두 분은 ‘인연’은 ‘인연’인 것 같다”며 “뜨거운 태양 아래 과수원의 배가 익어가듯 두 분의 신앙도 잘 영글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필자가 아내를 쳐다보며 “서영 엄마, 우리 이제 그만 토닥거리고 수사님 말씀처럼 거역할 수 없는 인연으로 만났으니 잘 지내며 삽시다”고 했더니 아내는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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