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샐리 스콧의 현대적인 작품 중 영국의 오래된 순례지 월싱엄(Walshingham)에 있는 유리 스크린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의 대중들에게 캔터베리 대성당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월싱엄은 유럽의 대표적인 성모성지 중 하나이다. 핀손 발라드(Pynson Ballad)의 텍스트에 따르면 1061년 신앙심 깊은 여인(리쉘디스 부인)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잉태사실을 알려준 ‘나자렛의 집’을 보여주고 이 사실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똑같은 집을 월싱엄에 짓도록 원하셨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일명 ‘슬리퍼 채플’(Slipper Chapel)이다. 이후 월싱엄은 중세인들에게 중요한 성지로서 알려져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이곳은 파괴되고 피폐해진 채로 남겨졌고 가톨릭 해방령(1829)이 내려지고 비로소 1896년 샤를로트 보이드(Charlotte Boyd)가 14세기 슬리퍼 채플과 그 주변 지역을 사들여 복원하였다. 현재 월싱엄은 성공회와 가톨릭교회에 성지로서 두 종교의 기념 성당이 들어서 있고 매년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바로 샐리 스콧의 작품은 가톨릭 성당 제단 뒤의 유리 스크린으로 설치된 것인데 이 작업을 위해 그녀는 성당 참사회와 수차례 회의를 거친 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 유리 스크린의 제작은 2010년 11월 월싱엄의 비전 950년을 기념하는 준비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아홉 쪽으로 나누어진 이 유리 스크린은 크게 세 부분의 테마로 다시 나누어볼 수 있다. 월싱엄의 주된 두 개의 테마는 중앙 날개 역할을 하며 제단화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즉 부활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광선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여인에게 ‘나자렛의 집’을 보여주는 성모님의 발현 장면이, 오른쪽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님께 잉태사실을 알리는 장면이 조각되었다. 이러한 사실적인 이미지들과 더불어 유리 스크린에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함께 재현되었다. 나뭇가지 아래에는 성찬식을 상징하는 포도덩굴과 밀단이, 중앙에는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개껍데기들이 묘사되어 있다. 조형적으로 볼 때 유리 화면에 묘사된 모든 인물들과 식물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이미지들이 감상자에게 충만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실적인 묘사, 단순한 선과 면,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여백과 음영? 어쩌면 유리 스크린에 비친 실제 밤풍경이 화면을 메워 비로소 작품을 완성한 때문은 아닐까. 하느님이 만드신 낮과 밤,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선물은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 지친 순례자에게 또 다른 은총이 될 것이다. 캄캄할수록 더 밝게 빛나는 촛불처럼 절망이 깊은 이에게 하느님은 더 깊게 자신을 드리우시리라.
.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