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799년 (正祖23) 경 충청도 덕산 (德山) 고을에 살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떤 문헌에는 그의 이름을 「병심」 이라고도 기록하였는 바. 이는 그의 아명인 듯하다. 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을 지녔던 그는 14세에 이르러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즉시 입교하여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여러 시간 동안을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며 이전에 자신이 범한 죄를 진실하게 통회하기도 하고, 주일과 축일에는 비록 비바람이 치는 궂은 날씨라 할지라도 자기의 집에서 10리나 떨어져 있는 공소에 가서 신심행사에 참례(參禮) 하기를 거르지 않았다.
21세에 신자 처녀와 혼인하여 경기도 양지(陽智) 고을의 은이라는 마을로 이사한 라우렌시오는 이후 보다 헌신적인 생활로 여러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며.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위하여는 언제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곤 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언제나 그의 신심과 박애심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그는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옷을 벗어 준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집 같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간혹 그를 보고 지나치게 애긍시사(哀矜施捨) 를 한다고 할때면.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주는 일은 그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주님께서 보다 큰 이자를 붙여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약간의 밭을 갖고 있었는데 그 농사일이 아무리 바쁘다고 할지라도 주일 파공(罷工) 은 철저히 지켜 규정대로 오후에는 절대로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밤마다 한시간 남짓동안 묵상을 하였고 4순절(四旬節) 에는 매일 대재(大齋) 를 실천하였다.
앵베르(Imbert)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뒤에 라우렌시오를 회장(會長)에 임명하여 신자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그는 그동안 배운 학식과 평소의 덕행과 끊임없는 모범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수행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일을 처리하였다. 다만 기해교난 (己亥敎難)의 박해를 전후하여 그가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가는 기록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그가 비밀리에 교리의 본분을 지키면서 회장의 직분을 다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가 있다.
1846년 병오교난 (丙午敎難의 박해가 시작되자 라우렌시오는 얼마동안 숨어서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던중 7월에 이르러 김대건 (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된 후 포졸들은 이재의 (李在誼) 토마스를 신부가 거처하던 집의 주인이라 생각하여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우선 토마스의 삼촌인 이신규 (李身逵) 마티아를 체포하여 조카가 있는 곳을 추궁하였고, 여기에서 토마스가 은이마을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포졸들이 마티아를 앞세우고 그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마을의 교우들이 모두 도망한 뒤였다. 그리하여 그 근방에 살고있던 라우렌시오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포졸들은 라우렌시오만을 남겨놓구 다른 사람들은 즉시 석방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단 후 혹독하게 매질을 하여 배교하고 동료들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그가 포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들은 다시 그의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깨진 그릇 조각들을 끼우고 나서 굵은 밧줄로 톱질을 하여 살이 파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그 무서운 고문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냈다. 이에 포졸들이 그의 정신에 감탄하여 다른 신자들에게『너희들도 진실한 천주교인이되려면 그처럼 해야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라우렌시오의 결심을 꺾지 못한 포졸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의 몸이 상처로 인하여 걸을 수 없었으므로 그를 말에 태워 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스스로 이 결정을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신조차 신을수 없는 발로 백여리가 넘는 험한 길을 걸어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후 라우렌시오가 어떠한 고난을 당했는지 자세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의 행적으로 볼 때 진실한 신심을 굽히지 않고 형벌을 참아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는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하였던 것이다. 문헌에서는 이러한 그의 죽음을 교수 (絞首) 혹은 장살(杖殺)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로. 때는 1846년 6월 20일 (陰8월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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