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옹알이를 한다. 이미 말할 수 있는 능력과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즐거움이다. 즐거워서 자꾸 말하고 그러다보니 말도 더 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한다. 말을 하면서 두뇌가 계발되어 창의력과 생각의 싹이 트고 사회적 관계의 토대를 만들어간다. 그러다가 아이는 말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면서 전체적인 인격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처럼 마냥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는다. 말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여 소통하는 화자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많이 하다못해 멈출 줄 모르는 몹쓸 수다병까지 생겼다. 학자들은 이를 병적 다변증(logorrhea)이라 한다. 휴대폰으로 인해 생겨난 병이다. 일단 전화기를 들었다하면 말해야 한다. 잠깐 숨만 쉬어도 “여보세요? 여보세요?”하면서 불러댄다. 그러니 쉬지 않고 말해야 한다. 얼굴을 맞대면 눈짓이나 몸짓만으로 느낌과 생각을 알아채지만 전화는 비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저 말해야 한다.
게다가 전화가 오지 않아도 늘 대기상태에 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손에서 놓을 수 없다. 통화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스마트폰과 떨어지면 지구 밖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에 허전하고 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화할 사람이 없으면 SNS 세상에 들어가 제3의 친구들과 소통한다. 한없는 소통의 터널로 들어가 잠시도 ‘말’을 쉬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말 중독’에 빠진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된다함은 인류학적으로도 참을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을성 없는 어린아이 같은 어른, 말 배우는 아이처럼 쉬지 않고 말하는 어른, 공공장소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전화만 들었다하면 말하는 어른, ‘13세 정신력’에 맞춰 제작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을 거리에서 차 안에서 공원에서 보면서 낄낄거리고 웃는 어른들이 참으로 많아졌다.
우리는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말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고, 장소와 상대에 따라 해야 할 말도 참아야 할 순간이 있다.
선비가 독서를 귀히 여기면 말 한마디 동작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왜 그럴까? 말하기는 책읽기의 일부이다. 읽는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 생각으로 말한다. 글 속의 말이 삶과 만나는 그 지점에서 생각은 깊어지고 말은 무거워진다.
말이 많아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을 접고 ‘글’을 읽자. 글을 읽다보면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도와 참 많이도 닮은 ‘침묵의 언어’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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