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에 나오는 윤지충 바오로의 순교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권상연 야고보의 순교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놀랐다. 그 이유는 윤 바오로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는 것. 그 당시 유교사상은 그 시대의 법이었고 현재까지도 유교 사상이 우리 일상에 많이 남아있는데 유교식 제사가 아닌 천주교 예절에 맞는 장례를 치르면 어떤 형벌을 받을지 알면서도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는 점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한 장 더 넘기면 또 어떤 대단한 순교자의 이야기가 적혀있을까 내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굳은 신앙심이 거룩하고 숭고하게 느껴졌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감명 깊고 감동이 컸던 순교자는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다.
이 아나스타시아는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관장에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셔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나는 이 아나스타시아의 나이를 알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당연히 성인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12세도 넘기지 못한 작은 소녀의 입에서 저런 대답이 나올 수 있다니 정말 하느님이 함께하고 계시지 않았으면 저런 용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성모님이 생각났다. 성모님께서도 혼인도 하기 전에 예수님이 잉태될 거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하나의 거스름 없으셨던 것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란 기도가 성모님과 이 아나스타시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용기가 겹쳤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순교자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 절대 밀고하지 않고 어떤 형벌을 받더라도 배교하지 않는다는 점. 둘째, 배교를 하더라도 금방 뉘우치고 더 굳은 신앙심을 가진다는 점. 셋째, 사형선고를 받을 때 기쁜 마음으로 순교를 한다는 점. 만약 내가 그 시대에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순교하지 못하고 배교했을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고 엄마가 “너는 종교를 위해 어느 선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니?”라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 책에 나오는 순교자 중에서 나보다 어린 나이에 순교한 사람도 있는 반면 나는 아직도 바람직한 신앙인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험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살인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란 어떤 것일까? 특히 나에게 있어 순교란 어떤 것일까? 나에게 압박과 박해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이고 목숨까지 바쳐 신앙을 지킬 일은 무얼까? 생각해봤다. 작은 순교, 내가 생각하는 작은 순교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많은 유혹을 뿌리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령 미래의 내 배우자가 신자가 아니더라도 중간에 냉담하지 않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작은 순교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순교는 나의 꿈을 빨리 찾아 목표를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지금처럼 반주봉사도 열심히 해야 될 것 같다. 말은 참 쉬운데 정말로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고 고민거리며 엄마와의 갈등 요소기도 하다. 하느님 저와 함께하셔서 내가 원하고 하느님이 원하는 길로 이끌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