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북이 쌓인 책더미 사이에서 미공개 원고지 200여 매가 쏟아져 나왔다. 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고 싶다며 절절이 기도하던 그가 눈물과 사랑의 언어로 채운 원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책 혹은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는 글이었다.
지난해 9월 선종한 최인호(베드로) 작가의 유고집 「눈물」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작가의 말도, 목차도 없는 미완성 글로 엮은 책이다.
오롯이 담긴 것은 작가의 깊고 내밀한 목소리뿐이다. 작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뱉은 영적 고백, 신 앞에서 진실하게 슬퍼하고 진실하게 기뻐한 한 작가의 이야기다.
최 작가는 ‘사랑하는 벗이여’로 글을 시작했다.
“이 편지를 받는 그대가 누구인지 아직 저는 모릅니다…이 편지를 띄우는 것은 우선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되어 하느님과 그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음을 그대에게 고백하고 이를 통고하기 위함입니다…하느님을 알게 됨으로써 죽어 버린 제 육체의 고백입니다….” (본문 19~25쪽 중)
5년 여 간의 암투병. 죽음을 앞두고 남긴 원고지 한 장 한 장에서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절대 고독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작가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애써 포장하지 않고,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정직하게 절망했고 정직하게 다시 일어서며 이 글을 남겼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그에 대해 응답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감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깊은 고독’ 속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 고독이 ‘하느님께서 과연 계신 것일까 하는 악마적 의심’마저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고독과 의심의 두려움은 제게 있어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입니다.” (본문 237쪽 중)
유고집에는 목차 대신 짤막한 내레이션들이 실렸다. 최 작가의 글이 끝난 뒤부터는 정진석 추기경, 이해인 수녀, 배우 안성기씨, 소설가 오정희씨 등 그와 평생을 함께 해온 친구와 스승, 후배,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회고들이 이어진다.
최인호 작가는 문학을 넘어 한국 문화계 전체 지형도를 바꾸고, 그 안에서 큰 별로 빛났던 인물이다. 그의 유고집 「눈물」 또한 극적 반전을 품어 안아 우리 곁에 오게 됐다. 최 작가와는 남다른 인연을 맺고 그의 작품을 도맡아 출판해오던 여백출판사는 그의 선종 직후 유고집 준비를 시작했다. 최 작가의 부인이 책 더미 속에서 미공개 원고를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이어 유고집 「눈물」의 모양새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됐다.
「눈물」 곳곳에는 최 작가와 형제처럼 지내던 출판사 김성봉(돈보스코) 대표가 직접 찍은 사진도 자리한다. 전문가의 사진처럼 세련되진 않지만, 최 작가의 문장과 그 눈물이 읽는 이들의 마음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함께하는 작품들이다.
김성봉 대표는 “최 작가는 자신의 고통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기에 쓰고 또 써야만 했고, 그 원고는 ‘나는 이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고 말한다”며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움으로써 작가 최인호는 신을 향해 ‘빈손’으로 나아가길 꿈꾸었고 벌거벗은 영혼으로 삶과 죽음을 보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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