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의 신비를 통해 보여주시는 이 관계 맺음은 억누를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방식이며 ‘실질적이고 친근한 만남’의 방식이다. 즉 상대를 직접 만나기 위해 그가 살고 있는 세상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가, 그 사람과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주고 실제로 대화를 나누며, 함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형성되는 관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낮춤, 그 분이 세상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그 분과의 인격적 만남(수직적 관계)을 통해 구원은 시작된다. 그리고 서로 기꺼이 삶을 나누고 봉사하는 교회의 공동체적 관계(수평적인 관계)를 통해 주님의 구원 사업은 이 지상에서 지속·확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원 사업을 중재하는 교회의 사목자들이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이 관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애쓰고, 공동체의 상호 관계가 원활하면서 또한 주님과의 소통도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이고 기름칠하는 일들이다.
청소년기가 사회적 인간으로서 본격적인 관계 맺기를 배워나가는 시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구원을 중재하는 데 있어 ‘관계를 형성하고 활성화’하는 사목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청소년 사목은 관계 사목(Relational Ministry)으로부터 시작되며, 관계 사목이 곧 청소년 사목의 핵심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청소년 사목을 잘하는 것, 다시 말해 관계 사목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는 과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예수께서는 성경의 곳곳에서 관계 사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계신다. 그 중에서도 자캐오를 대하는 예수의 모습(루카 19,1-10)은 특히 청소년 사목자들에게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캐오처럼 청소년들도 자신이 남들이 비해 ‘작은’ 존재라는 점에 열등감을 느끼고, 혼란에 시달리며 죄의 유혹에 빠진다.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며, 때로 그들을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캐오가 그랬듯이 청소년들은 예수님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한 번쯤은 그 분을 만나 뵙기를 갈망한다. 비록 ‘믿음이 좋은 어른들’ 뒤에 가려져 그들의 소박한 갈망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무화과나무 위에 달음질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도 분명 예수님을 향한 마음과 열정이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자캐오를, 그런 청소년들을 쳐다보신다.(루카 19,5) 나무 틈새로 숨어 있어 잘 보이지 않음에도 관심을 갖고 찾아내시어, 그의 마음과 열정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주는 따스한 눈길을 보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서 내려오라고, 당신께 가까이 오라고 이르시며 또한 당신이 직접 그의 집에 가서 머무르겠다고 하신다. 그러자 자캐오는 얼른 예수님께 다가가 그 분을 맞아들인다.(루카 19,6) 예수께서 하셨듯이 이렇게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줄 때, 저 멀리 무명의 존재로 가려져 있는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공동체로 초대할 때,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고 구원의 기쁨이 시작된다. 그들도 자캐오처럼 스스로 어둠과 죄의 영역에서 뛰쳐나와, 기꺼이 예수님의 손을 맞잡고 그 분을 자기 집에, 그들의 세계 안에 친구로서 모시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거리낌 없이 자캐오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신다. 그러자 자캐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갚아주며,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결심한다.(루카 19,8) 예수님과 함께 보낸 우정 어린 시간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회심의 순간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노라고 확언하신다.(루카 19,9-10) 이와 같이 청소년의 마음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해주는 것. 어리고, 작고, 쉽게 유혹에 빠진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는 것. 예수께서 하셨듯이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바로 청소년 사목의 기반, ‘관계 사목’의 과정이다. 이 관계를 통해 청소년들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 회심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해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해 보여주신 구원의 방식이며,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사랑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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