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호 글/조금희 그림/288쪽/1만 4000원/여백
“가톨릭 신자로서 앓고, 가톨릭 신자로서 절망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희망을 갖는 혹독한 할례의식을 치렀다. 나는 이 할례의식을 ‘고통의 축제’라고 이름 지었다. 아직도 출구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피정 기간 동안 느꼈던 기쁨을 많은 분들께 전하려고 한다.”(15페이지)

동시에 육신의 쇠락과 문학적 죽음을 견디며 ‘끝’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 진실을 담은 삶의 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고통을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로 받아들이고 영혼의 재생을 경험하며 감사함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 이 책은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이한 작가의 인생을 기념하는 문집이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책 초반부, 머리글과 차례를 지나 만나는 작가의 첫 문장이다.
그는 투병 초기,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암에 걸린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세상을 향한 문을 닫고 안으로만 침잠해 들어갔고 계속된 방사선 치료로 육신과 정신은 지치고 늙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천사와 같은 머리 깎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며 비로소 죄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병원 안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 아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가정 속에서 소중한 우리의 아빠, 엄마, 딸, 아들,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이 온갖 병으로 스러지고,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을까. 그들은 모두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20페이지)
이 책 속에 실린 글들은 2008년 5월 첫 수술을 받고 난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1부는 가톨릭 ‘서울 주보’에 5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그는 2부에 대해서는 “수상(隨想)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며 굳이 이름하자면 연작소설”이라고 했다.
이 책의 끝에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이태석 신부와의 인연도 소개한다.
작가는 나름의 ‘자존심’을 이유로 추기경과의 식사 자리를 거절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당시 추기경의 섭섭해 하던 눈빛, 쓸쓸한 그 눈동자, 입술이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추기경이 선종한 뒤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렸다는 그는 “언젠가 천상의 식탁에서 만나 미뤘던 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며 애틋한 마음을 전한다. 또 2010년 1월, 4차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다시 입원했던 작가는 옆 병실에 입원 중이던 이태석 신부와 만나 짧지만 깊은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어서 어서 꽃 피는 춘삼월이 왔으면 좋겠다.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 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머리글)
작가의 머리글 바람대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에게 따뜻한 숨결을 흘려보낸다. 아울러 등단 50주년을 맞이한 그가 지난 5년의 세월을 토대로 앞으로 더 ‘먼 길’을 가리라는 기다림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