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끊기’ 이주연 기자
“한참 시간이 지난 듯한데 이제 10여일
거리엔 웬 카페가 이렇게 많은 것일까”
.jpg)
그리고 슬슬 금단현상이 생기는 듯하다. 아침과 식후의 시간이 유독 심하다. 그간 녹차나 홍차로 커피 마시고픈 아쉬움을 대신했는데, 이제 인내의 한계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자주 짜증스러워지고 온 몸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 집에서는 커피 머신을 아예 분해해 놓았다. 커피 마실 꿈도 못 꾸게 하기 위한 나름의 안전장치다.
하지만 내 심정과 달리 주변에는 커피가 넘친다. 옆자리에서 부러 한껏 커피향을 풍기며 커피 마시는 티를 내는 동료 기자의 모습도 성질을 돋우고 TV를 켜면 광고 속에서 커피를 마시라 유혹한다. 거리에 나서면 한집 건너 한곳이 카페들이다. 마주칠 때마다 ‘어서 들어와 커피 한잔 하고 가세요’라고 말을 거는 듯하다. 언젠가 미국서 잠시 귀국한 후배가 “한국엔 웬 카페가 이렇게 많냐?”고, “한국은 밥보다도 커피를 즐기는 민족인 것 같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취재처를 방문하니 처지(?)를 아는 이들이 녹차, 유자차, 국화차 등 다양한 종류의 차를 건네며 나의 결심을 배려해 주었다. “그 좋아하는 커피를 못 드셔서 어떻게 하냐”며 위로의 말도 주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꼭 짓궂은 이들도 있기 마련. “이제 커피는 일상인데, 그것이 뭐 그리 큰 사순절 극기 절제가 될 수 있느냐”며 딴죽을 건다. 그리고는 “이 참에 한잔 마시라”며, 짙은 향의 커피 잔을 내민다. ‘마귀’ 가 따로 없다.

퇴임을 선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재의 수요일 알현 자리에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지낸 예수님처럼, 가톨릭교회와 신자들은 사순시기에 하느님 은총을 체험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탄으로부터 권력과 이기심의 유혹을 받는다”며 “사막에서의 체험이 곧 은총의 시간으로 변모된다”고 지적하신 바 있다.
커피 한잔이 주는 즐거움을 애써 인내하며 그 작은 기회 속에서도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크나큰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금주’ 서상덕 기자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기적’
상상 못하던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니”
.jpg)
어렸을 때,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뭘 하셨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던 적이 있다. 악마가 나타나기 전까지 꽤나 심심하지 않으셨을까.(어린 마음엔 그랬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렇다. 삶에서 중요한 뭔가가 빠진 것만 같다.
가끔씩 ‘몰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가도 ‘약속’ ‘안주’ ‘광장’ 등과 같이 조금이라도 술과 관련된 단어가 함께 떠오르면 생각은 이내 뒤죽박죽이 돼버리고 만다. 한동안은 연관어가 명사형에 머물다 이젠 ‘시원한’ ‘맛있는’ ‘끝내주는’ 같은 용언으로까지 전이되면서 술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꼴깍 침이 넘어간다. 이런 게 금단현상인가. 평소 안하던 짓을 하려니 머리나 몸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금주선언을 한 후 술자리에서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술잔을 받는 일과 술병을 들어 ‘병권(甁權)’을 행사하는 일은 확연히 줄었다. 대신 딴 사람의 술잔이나 술병 속의 술높이를 열심히 관찰하게 된다. 늘어나는 술병 수를 세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건배용’으로 따라놓은 술잔을 들어 몰래 코끝에 대어보기도 한다. (크, 죽이는…. 이래서는 오래 못 가는데.) 술을 입에 안 댄 날이 별로 없는 나에게 지금 겪고 있는 금주의 길이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나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술과 거리를 둔 채 힘겹게 한 주 두 주 사투를 벌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가운데 하나가 ‘기적’이라는 소리다. 한동안이라지만 술과 담 쌓고 지내는 것 자체가 기적이래나 뭐래나.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 소소한 일상이 되고 있다니…. 정말 이런 게 기적일까.
이런 상념들과 함께 존재 자체가 기적일 수밖에 없는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내 삶에서 조금씩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오늘의 내 모습에 비춰보면 기적은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게 아닌 듯하다. 기적은 그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눈을 지녔는지 아닌지로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생각 또한 사순시기가 내게 열어 보여주는 기적인지 모르겠다.
‘스마트폰 끊기’ 조대형 기자
“습관적으로 주머니 속 휴대전화 떠내
이 공허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반응이 재밌다. 다들 신기한 듯 내 휴대전화를 만져본다. 마치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추억의 장난감을 다시 접한 것처럼 반가워한다.
스마트폰은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우리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처음 스마트폰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이렇게 빨리 스마트폰 사용자가 급속히 많아질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 수는 2012년 말 기준 32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스마트폰을 끊은 지 어느덧 10일이 지났다. 불편함은 차치하더라도 허전함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공허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학창시절 매일 어울려 놀던 단짝 친구가 멀리 이사 갔을 때 마음이 이랬던가.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을 떠나보내고 맞이했던 아침이 이랬던가. 둘 다 적절한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일상을 차지하고 있던 큰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기분은 사뭇 비슷하다.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담배를 대신할 사탕과 초콜릿을 찾듯 나는 스마트폰 금단현상을 해소할 무언가를 찾아야 했고 나의 선택은 신앙서적이었다. 재의 수요일 이후 가방 속, 침대 머리맡, 심지어 화장실에도 책을 뒀다. 아직 책을 펼치는 과정까지 매끄럽지 않지만, 예전처럼 스마트폰에 온종일 고개를 파묻고 있지 않다는 점은 긍정적인 변화의 시작일 것이다.
거듭 밝히지만, 단순히 스마트폰을 끊는 것만으로 사순시기를 잘 보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하느라 허투루 보내던 시간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40일은 완성될 수 있다. 하느님이 이번 사순시기를 통해 나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 선물을 찾는 것이 이번 사순시기 숙제다.